Page 38 - 관악부 100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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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성황리에 개최 되었는데 아쉬운 점은 여러 음악단체들이 참가하여 나름대로의 실력을 충분
히 발표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문용의 노력과 재력(財力)이 없었다면 성사(成事)되기 어려
웠을 것이다. 그의 구상과 추진력으로 고려대학교 문화예술 교우회지인 高藝 창간호(2013, 11)
에 이어 통권 2호(2014, 2) 3호(2014, 7)가 발행되어 문화예술에 관계하고 있는 교우들을 비롯
하여 시민들에게도 적지 않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5. 맺음말
우리나라 서양음악 연주단 창설과 사회적 배경을 살펴보면 대한제국(大韓帝國) 군악대가 그
효시(嚆矢)라 할 수 있다.
대한제국 군악대는 군부대신(軍部大臣) 민영환(閔泳煥 1852-1916)의 주청(奏請)으로 창단
되었다. 그것은 高宗 33년(1896) 5월에 러시아(露國)황제 니콜라이(Nikoli) 2세의 대관식(戴冠
式)에 참가시키기 위해 민영환을 전권공사(全權公使)로, 다음해인 고종 34년 1월에는 또 영국
독일 등 6개국 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서양문물을 접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고종 37년(1900) 12월에 대한제국 군악대가 창설되고 다음해인 고종 38년 5월에 일본에서
활약하며 일본국가 『기미가요』를 작곡한 독일 음악가 프란츠 폰 에케르트(Franz V. Eckert 양
화진 외국인 묘역에 묻힘)를 군악대 교사(敎師)로 초빙(招聘)하여 도착하였다. (韓國史 年表, 震
檀學會, 乙酉文化社, 1959, PP. 308-312)
대한제국 군악대는 종로 파고다 공원(탑골공원 이라고도 하며, 고려시대에는 흥복사(興福
寺), 조선시대에는 원각사(圓覺寺)가 있었는데, 연산군(燕山君) 때에 폐기(廢棄)된 후 장악원(掌
樂院)을 옮겨와 기생, 악사들의 숙소로 사용되다가 1902년에 공원 서쪽 부지에 군악대 신축 건
물<세계대백과사전 27, p, 16295. 동서문화, 2002>)에서 연습하며 기량(技倆)을 연마(硏磨)하
였다. 한편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에 전동(塼洞, 현 종로구 수송동)에서 개교하여 1918년 9월
에 낙원동(樂園洞)으로 이전하고, 1922년 9월 다시 송현동(松峴洞)으로 옮겼으니(고려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