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1 - 관악부 100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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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U W O
고대관악부 1970년대
| 이성규(산공 69) 교우의 문화예술축전 참가 회고
1971년도로 기억된다. 초여름 어느 날 학교캠퍼스 광고란에 전국대학축전을 알리는 광고 포스터가
붙었다. 처음 순간에는 전국에 멋있고 잘하는 음악 모임이 얼마나 많겠는가? 우리 밴드는 주요멤버
몇 명은 고등학교 때부터 나팔을 불었지만 그 나머지 부원은 실력이 뻔하지 않는가? 그러나 시간이 지
나며 점점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상금 액수도 꽤 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특히 음대전공생은 참여
할 수 없고 합주부분은 우리 같은 밴드에 딱 어울리는 시합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출정을 결정하고 나니 마음은 이제 한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저 열심히 연습하는것 이었다. 아
무도 그 생각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올해에도 첫 행사인 5월 개교기념식에서 감히 힘든 밴드 퍼레이
드를 잘 해내지 않았는가? 여름합숙을 통하여 마음이 잘 단합되어 있지 않는가? 우리 부원들은 정말
열심이었다. 온몸의 힘을 다 소진시키는 고연전 응원에서 다져졌을까? 여러 번의 합숙 훈련에서 다져
진 한마음의 단합된 단체정신이랄까? 지동직 선배와 또 한분은 수자폰 주자가 필요하다는 말에 주저
하지 않고 나와서는 힘들고 크고 재미없는 수자폰을 메고 연습에 빠지지 않았고, 거기다 악기를 번쩍
번쩍 거리게 닦고 닦았다. 번쩍거리는 양쪽의 수자폰과 트롬본 유포니움은 소리도 듣기 전에 무대와
관중을 제압했다. 이화여대 강당에서에서 열린 예선에 성공했다. 곡명은 「십자훈장」 서곡이 아니면
시인과 농부였던 것 같다. 예선전 무대에 올라온 팀들을 보니 우리는 정말 멋있는 팀이었다. 연주 인원
이 우선 압도적인 30여명이 넘었고 장비로 보면 누가 보아도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번쩍이는 나팔들,
거기에 소리는 좀 웅장한가? 웅장한 십자훈장을 연주하고 나서 혹 다른 대학에서도 브라스밴드가 나
올지 몰라서 살펴보았는데 전무했다. 그저 클라리넷에 첼로 그 정도의 실내악단 아니면 4-5명이 기타
치고 노래 불러 봐야 우리들 트럼펫 2-3명 보다 소리가 작았다.
한 달 정도 뒤에 시민회관 대강당 무대에서 본선이 치러졌다. 시민회관(지금의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무대는 정말 크고 웅장했다. 무대가 크면 클수록 우리는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고연전 운동장 응원을
통해 키워온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 되었다. 주위에서 아무리 난리 응원을 해도 연주를 틀리지 않는 집
중력, 흔들리지 않는 배짱 등이 이 조용하고 엄숙한 무대를 우리의 놀이터로 만들었다. 우리 서로의
우렁찬 나팔 소리는 우리끼리 서로 더욱 힘을 북돋워 주었다. 합주의 힘이 그렇듯이 우리는 일등 대상
을 차지하였다. 사실 음악 비전공자로써 우리 밴드에 대적할만한 모임이 전국 대학에는 없었다. 우리
는 가장 멋있는 대학 밴드가 되었다. 얼마 후 세종문화회관에서 치러진 시상식에 69동기인 드럼 김지
원(독문과 69)과 같이 참가하여 수많은 팀들 앞에서 대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