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 - 전시가이드 2021년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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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중복 N.1, 캔버스에 아크릴릭, 1971 대척지로 가는 길, 4월. N.4, 93, 146×114cm, 캔버스에 아크릴릭, 1993
실히 드러나 있다. 발현되기 시작한다. 단청이 하늘을 수놓으며 우주의 기운을 표현하였다. 프랑
스와 한국을 오가며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극지의 만년설이 쌓인 설산, 오로라
2018년 3월부터 7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성자: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와 같은 신비로운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하늘에는 서로 겹치거나 기대고 있는
길'이라는 타이틀로 작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가 있었다. 전시의 구 반원형 색동 띠들과 태양같은 원, 반달같은 도형들이 어울려서 화면을 떠다닌
성을 보면 작가의 시기별 변화를 4기로 나누었다. 1기는 초기 조형적 실험하 다. 반달같은 음양의 도형에 걸쳐진 연꽃의 모티브, 밤과 낮의 풍경을 붉은 색
던 '조형 탐색기', 2기는 1960년대 '여성과 대지', 3기는 1970년대 '음과 양', 4 과 파란 색으로 바탕색을 택한 것도 단청에서 받은 영감은 아닐까? 하늘에 뿌
기는 1980년대 전후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로 크게 구분한 것 같다. 그 중 려진 알록달록한 수 많은 점들은 별이나 은하수를 의미할텐데 궁궐이나 사찰
에서 단청의 이미지가 보이기 시작한 때를 특히 주목하고 싶다. 1977년 겨울 의 현판을 보면 염우판에 그려진 칠보 문양의 단청에 오색 방울들이 공간을 장
귀국하여 경남 진주에 들린다. 새해 첫날 창녕 화왕산 기슭에 있는 부모님 산 식하고 있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하면 지난친 비약일지 모르겠다.
소에 가던 중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었다고 한다. 온 '대척지로 가는 길'과는 다른 작품인 '공간중복 N.1' 에서는 선을 긋는 것이 인
산이 흰 눈으로 뒤덮히다 보니 산 중턱에 있던 조그마한 사찰의 단청이 유난 상적인데 한옥의 창살 같기도 하고, 벽긋기라는 단청과도 비슷한 느낌을 준다.
히 화려하고 선명하게 보이게 되었을 것이고, 그 풍경이 그대로 작품으로 다 궁궐이나 사찰의 기둥과 기둥 사이에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외벽을 보면 벽긋
가왔다는 것이다. 기라는 단청을 하여 장식하고 있다. 벽긋기는 두 개의 선을 벽의 가장자리에
이 때의 상황을 작가의 말로 옮기자면 '어느해 정월 초하루 날, 함박눈이 내려 그음으로써 밋밋하고 단조로운 느낌을 상쇄시킨다. 이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세상을 흰색으로 되덮었다. 그때 나는 갑자기 산 중턱에 있는 절 지붕 밑의 단 그은 같은 모양의 몇 개의 선들은 단청의 벽긋기가 연상되기도 한다. 이렇듯
청을 보았다. 바로 그것이었다. 오색으로 그려진 작품, 나는 거기에서 확신을 작가 내면에 흐르는 한국적 정서가 화면에 뿌려져서 현대적이고 회화적인 단
갖게 되었다.'고 술회하였다. 오랫만에 귀국하여 고국에서 눈 덮힌 설산을 바 청의 꽃이 피게 되었고, 단청에서 받은 영감을 새롭게 많은 작품으로 승화시
라만 보아도 가슴이 뭉클할텐데 눈 속에 푹 파묻힌 조그마한 사찰의 처마 밑 켜 국제적인 작가로 발돋음 할 수 있었다고 자부하고 싶다.
에서 오색 빛깔의 단청을 발견했으니 그 감동이 얼마나 짜릿했을지 짐작할 만 동양을 상징하는 걸출한 예술가로서 '동녘의 대사 (ambassadrice de l'aube)'
하다. 순백의 함박눈과 대비되어 단청이 뿜어내는 오방색의 강렬한 빛이 작가 라고 불리는 것도, 파리 시립 미술관장이었던 J.라세뉴(Jacques Lassaigne)
의 눈에 비치는 순간 전율이 가슴 깊숙이 꽂히게 되었을 것이다. 가 '이성자는 자신의 동양적인 유산에서 나온 오묘한 성격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서양미술의 흐름 속에 용기 있게 합류하는 본보기'라고 극찬한 것도 지극
그 후에 '대척지로 가는 길'이란 작업을 하면서 단청으로부터 받았던 영감이 히 당연한 말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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