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3 - 전시가이드 2022년 06월 이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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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보도자료는  crart1004@hanmail.net  문의 010-6313-2747 (이문자 편집장)




























                           공간배열(네개의 컵), 73×60.6cm, Oil on anvas, 2022              좁은 문, 960.6X72.2cm, oil on canyas, 2022






            목가적 풍경과 진배없어 보인다. 그러나 작가가 추구하는 그것은 자연주의자의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정서나 광선주의자들의 지적욕구와는 그 출발부터가 다른 것인데, 바로 그 점이
            우리가 이제부터 주목하고자 할 내용이다.                          존재를 추월하면서도 더 잘 그것을 설명하고 입증하는 차원, 혹은 풍경을 가장
                                                            사실적으로 다루면서도 상징의 차원에 등재시키고, 초현실의 차원을 접목하면서도
            사실,  독립적인  풍경화의  역사가  보다  일찍  천국을  배반했던  -대략  17세기-   사실로부터의 근거를 부정하지도 않는, 이를테면 변증적 의미의 초현실성으로,
            북구의 네덜란드로부터 가능했다는 역사를 조회할 때, 황학만의 그것은 오히려       초현실주의는  현실에  대한  조건  없는  혐오와  꿈으로의  도피라는  양측에  의해
            장르로서  일반적인  풍경화와는  정반대의  속성을  지니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지지되고 있다. 그렇다면, 황학만의 상상세계와 초현실성의 기원은 어디며, 그
            한다. 왜냐하면, 작가의 풍경은 오히려 천국만이 허락할 수 있는 어떤 특권적인     궁극적인 지향은 또 어딘가? 작가는 자신의 상상의 근원이자 초월의 궁극으로서,
            소망으로부터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작가가 풍경의 모티브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회화에 등장하는 모든 장치들을 독해할 진정한 좌표로서 자신의
            자신의 내적영역에 더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실경으로부터     신앙과  고백,  그리고  자신이  한때  포기한  적이  있는  천국으로부터의  소망을
            출발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작가는  몇몇  풍경의  소재를  그가   말한다.  아마도  이  같은  맥락에서라면,  그가  설정한  통로는  그곳,  영혼  깊은
            가졌던  성지(이스라엘)  순례로부터  직접  차용하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즉   곳으로부터  고백을  담은  그곳에  도달하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암시하는  것일
            그것들이 감람산과 골고다, 혹은 요단의 기슭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하더라도,      게다. 그것의 재질이 나무인 까닭은 그 소통의 힘이 골고다의 나무십자가로부터
            예외 없이 작가의 상상에 의해 다듬어졌으며, 주의 깊게 재구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유래했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알 수 있다. 예컨제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이스라엘 먼 언덕은 실제의
            골고다로부터가 아니라, 작가의 내면으로부터 상상된 풍경인 것이다.            어떠한 경우든, 황학만의 회화는 동일한 정적에 쌓여있다.
                                                            시간은 마치 묵상과 참배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정지되어있다. 그러나 그 엄숙함은
            예외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황학만의 회화는 자연주의(Natural-     좁은  통로를  통해  부단히  우리를  향하는  밝은  빛에  의해  적절하게  조율된다.
            ism)나  사실주의(Realism)에  가반을  둔  서정적  태도보다는,  초현실주의  이렇듯, 원근을 타고 다가오는 빛으로 조율되는 동안 그의 회화는 침묵하지만,
            (Surrealism)에 의해 더 잘 설명된다.                      그것은 일체의 소란스러움을 배제한 정갈한 웅변의 형태를 입고 있다. 작가의
            예컨대,  서로  상반된  두  세계의  통로로  작용하는  나무상자의  트인  전면으로   회화는 조용한, 그러나 흔들림 없는 질서와 균형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분명하게  드러나는  상징적  풍경의  조합은  데페이즈망(dépaysement),  즉   균형은 수직과 수평의 공존, 무거움과 가벼움의 교차, 상처와 치료, 고단한 현실과
            사물들을  그  맥락과는  무관한  이질적인  것들과  병치시키거나  충돌시킴으로서   영원한 안식의 공존으로 독해 될 수 있을 그것들에 의해 더 심원하고 견고한 어떤
            현실계를  위반하고  몽환의  차원을  개입시킨다는  초현실주의  수법을  환기하게   것으로 화한다. 모든 의미를 마치 하나의 시구(詩句)처럼 압축한 교차와 공존의
            한다. 데페이즈망은 이밖에도 작가의 회화 전반에서 목격되는데, 작가의 소리는      긴장감 앞에서 관객은 이해와 인식의 번거로운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이다.
            해변이 아니라 나무 통로의 내부에 놓여있고, 새는 수풀대신 상처를 싸맨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다. 이 같은 인위적 만남, 예외적 충돌은 현실세계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앞서  우리는  작가의  세계가  단지  한편의  서정시로만  읽혀져서는  안  되리라고
            않은 설정이다. 그러므로 이미 사실주의와는 결별한 황학만의 회화 앞에서 우리의     했지만,  그럼에도  그곳에는  잘  조율된  서정성이  필요한  만큼  자리하고  있다.
            관심은 마땅히 존재하는 것들을 넘어 존재하지 않는 것들, 혹은 존재를 초월하는     시로서 시 이상의 것을 지시하기, 혹은 이상의 것을 언급하면서도 단지 시로서
            것들로 향해야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존재의 초월이 존재의 부정을 의미하는       수줍게 존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황학만의 회화적 재능의 진정한 근거일 것이다.
            것으로 이해될 필요는 없다. 마치 초현실주의가 꿈을 다루면서도 역설적으로 더
            진지하게 현실의 문제를 언급하듯이, 황학만 회화의 초현실성은 아마도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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