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0 - (사회돋보기)노규수 컬럼집-본문(최종)_N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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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서 한 장을 챙겨 들고 아무 말 없이 인쇄소를 나갔다고 한다.
이종일은 즉시 천도교 유력자인 최린(崔麟)에게 이 사태를 보고했고, 최린은 자
신의 집에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하고 은밀히 신철을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 최
린은 신철에게 민족을 위해 며칠 동안만 입을 다물어 줄 것을 부탁했다. 이때 최
린은 그에게 5,000원을 주며 만주로 떠나라고 권고했다고도 한다. 당시 쌀 한 가
마니의 값이 41원이었고, 상머슴의 1년 연봉이 쌀 10가마니 정도였기 때문에
5,000원은 엄청난 거금이었다.
후일 일본 측 기록에는 신철이 그 돈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한국 측 기록, 특
히 애국지사들의 증언에는 그가 돈을 받지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나갔다고
되어 있다. 어쨌든 최린의 집에서 나온 신철이 입을 다물어버림으로써 3.1운동
모의는 비밀이 유지될 수 있었다. 결국 만세운동 지도부에서는 보안상의 심각성
을 고려해 3월 3일로 예정된 거사를 1일로 앞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신철은 곧 만주에서 신의주로 독립단이 잠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며 신의
주로 출장을 떠나 버렸다. 그리고 만세운동이 진압될 무렵에 일본 경찰은 그가
배신했다는 것을 알고 5월 14일에 서울로 압송해왔다. 결국 3.1운동 정보를 상
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경성헌병대에 투옥됐고, 거기서 그는 자살하
고 말았다. 그것이 매일신보 1919년 5월 22일 자의 기록이다.
그렇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던 것이
다. 또 여름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저렇게 울어야 했고, 가을 간밤에는 무서리
가 저리 내려야 했으며, 그 꽃을 보기 위해 나는 잠도 오지 않았던 것이다.
악명 높은 일본 고등계 형사 신철은 자살로 인생을 마감해야 했다. 한국의 근
대 시민운동이 처음 발생하고, 100년이 가까운 오늘날까지 국경일로 기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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