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8 - 칭의와 성화-김세윤
P. 28
과 이스라엘의 이 언약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왕과 백성, 목자와 양 떼, 신랑과 신부, 농
부와 포도원의 관계 등으로 그리는데, 이 언약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복 주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의무를 스스로 지신 것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예배하
고 순종하는 의무를 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하나님과 온 인류의 관계의 한 특수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에는 언약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온 인류와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 피조물
들을 보살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물론 심지어 하나님의 특
별한 백성인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순종해야 하는 의무를 다하지 못하여, 즉 하나
님과의 관계에 신실하지 못하여 ‘불의’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죄요, 인류의
죄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사탄의 죄와 죽음의 통치 아래
떨어지게 한 것입니다.
인간의 아비는 자식 도리를 못하는(‘불의’한) 자식을 내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자신도 아
비 노릇 해 주어야 하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여 ‘불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배신한
(‘불의’한) 자신의 피조물인 우리를 인간의 아비와 같이 내치시면 인간에게는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또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하나님 역시 그와 피조물(또는 이스라엘)
간의 관계에서 나오는 자기 쪽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신 것이니, 하나님도 ‘불의’한 것 아닙
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 계시하셨습
니까? 인간이 자신을 배신하고 죄에 빠졌어도(인간은 ‘불의’해도)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용
서하여 주시고 끝까지 아빠 노릇 해 주시는 분이라고(하나님은 ‘의’로우시다) 하지 않습니
까?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 해 주심이 있어 구원이 왔다는 기
쁜 소식 아닙니까? 창세기의 아담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근본 문제와 하나님의 구원을 설
명한 ‘탕자의 비유’(눅 15:11~32)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도 이러한 의미로 그리스도의 사건을 해석하면서 복음을 선포한 것이 로마서
3:24~26이다”라는 관점이 앞서 케제만(Käsemann) 의 주석을 예로 들어 제시한 새 해석입
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내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 대한 자신
쪽의 의무를 다하셨다, 즉 자신의 ‘의’를 보여 주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 죄인들
의 죄를 씻어 버리는 제사로 드려지게 하여 우리가 용서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로
회복되게 하셨으니, 자신의 ‘의’를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우리가 의인(하나님과 올바른 관
계를 가진 자)이 되게 하셨다.”
그러기에 그리스도 사건은 하나님의 의를 계시하는 사건이고(롬 3:21), 그것의 선포 또는
이야기(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다(롬 1:17)는 것입니다.
로마서 3:24~26에 대한 이 두 해석들 중에 어떤 것을 택해야 하는가? 결정하기가 참 어려
운 문제입니다. 바울신학 체계 전체를 보면 로마서 3:24~26을 법정적 범주로 해석한 전통
적인 해석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지지하는 문구들이 많습니다. 앞에서
가령, 갈라디아서 3:13에 나타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으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속하셨다”라는 구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명백한 법정적
범주로 해석한 것입니다. 또한 로마서 8:3을 보면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사 그의 아들
의 몸에서 죄를 정죄하셨다(condemned)”라고 하는데, 이것 역시 법정적 해석입니다. 그래
서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법정적 해석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구약적 전승사의
관점에서 ‘의’를 근본적으로 관계적 개념으로 보고,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