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 - 칭의와 성화-김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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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로 심판받게 된다는 바울의 가르침(참조. 롬 14:10; 고후 5:10)과 연계하여 ‘성화’의 과
정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한 번 칭의 된 것에 자만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
에 따른 의로운 생활을 하려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칭의를 순전히 법정적 의미로만 가르치고 그것의 관계적 의미는 가르치지 않으며,
그것을 성화와 구조적으로 분리하여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가운데, 칭의는 율법의 행위로
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믿음으로만 얻는 것이라는 바울의 강조(종교개
혁 전통의 강조)를 정통 신앙의 시금석으로 삼도록 가르치면, 자연히 성화에 대한 열정이
식고, 도리어 성화에 대한 열정이 바울이 경계하는 율법의 준행으로 얻는 ‘자기 의’를 내세
워 칭의를 얻으려는 ‘이단 신학’에 빠지지 않나 걱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대다수 한국 목사
들이 가르치는 왜곡된 칭의론, 성화와 분리된 칭의론, 의로운 삶을 낳기는커녕 도리어 방
해하는 칭의론입니다. 이것이 전통적인 신학의 ‘구원의 서정’의 틀의 한계입니다.
여기서 근래의 칭의론에 대한 새 관점 학파와의 토론에서 얻은 통찰이 도움을 줍니다. 앞
서 살펴본 대로 새 관점 학파의 전제는 유대교가 근본적으로 ‘언약적 율법주의’의 종교로
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선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의 관
계에로 ‘진입’(getting in)했으니,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그 관계에 ‘머
무름’(staying in)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전제를 두고
토론을 하다 보니, 바울의 칭의론도 그것의 관계적 의미와 종말론적 유보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면, 이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이 환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은혜로/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칭의 된 우리는 지금 벌써 하나님과 화평
을 누리게 되었다고 선언하고, 그것을 ‘화해’라는 그림 언어로 부연 설명하는데, 그것은 “하
나님과 회복된 구원의 관계 속에 하나님의 은혜로 ‘진입’한 자들로서 우리가 그 속에 ‘서서’
아직도 지속되는 이 세상의 고난 속에서도 그의 은혜에 나아가 그것을 덕 입을 수 있게 되
었다. 그러므로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석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주 예
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칭의의 완성, 하나님의 영광을 얻을 때까지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인내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롬 5:1~11).
그러기에 바울도 은혜로 주어진 칭의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회복된(즉, 올바른 관계에
‘진입한’) 신자들에게 종말의 완성 때까지 그 관계에 계속 ‘서 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고전 10:12), ‘서 있지’ 않는 자들은 ‘헛되이 믿는’ 자들로서(고전 15:1~2), 출애굽 시대의 이
스라엘 사람들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출애굽의 구원의 ‘첫 열매’를
경험하고, 기독교 신앙의 세례 받음, 성령 받음, 성찬 참여 등에 해당하는 은혜의 체험들을
했지만, 그들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언약의 관계(의지와 순종)에 서 있지 않아 약속의 땅,
구원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멸망당한 사실에 대해 바울은 우리 그
리스도인들을 위한 ‘경고의 예표’라고 합니다(고전 10:1~13).
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자신의 언약을 신실히 지켜 메시아(종말의 구원자) 예수를
보내시고 그를 통해 구원을 이루어 주셨는데, 유대인들은 그 메시아 예수를 믿지 않고 거
부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 언약의 관계에서 자신들 쪽의 의무, 곧 하나님의 은혜를 믿
고 의지하고 그의 선한 뜻에 순종하는 일을 하지 않은 것이요, 그 언약의 관계에 ‘서 있음’
또는 ‘머무름’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줄기에서 떨
어져 나간 가지들이 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의 은총에 힘입어 사는 그 관계에 신실히 서 있기를 지속하지 않으면, 유대인들과 마찬가
지로 내쳐지게 될 것이다”(롬 11:17~24).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신의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