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5 - 칭의와 성화-김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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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
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계속 머무르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
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골 1:21~23).
칭의를 그 법정적 의미와 관계론적 의미, 그리고 그것의 종말론적 유보를 다 고려하여 정
의하면, 칭의란 지금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그 구원의
사건이 효력을 발생하여 (죄를 용서받은)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는 것인데, 그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하나님께 대항하며 산 아담적 실존에 종지부를 찍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
면서 사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로 회복됨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계
속 믿음으로 그 관계 속에 서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면, 그리스도 재림 때
있을 최후의 심판에서 그들의 칭의는 완성되어 의인으로 확인되고, 하나님의 영광과 영생
을 얻게 됩니다.
6) 칭의는 ‘주권의 전이’다
이렇게 우리는 새 관점 학파의 술어들인 ‘진입’과 ‘서 있음’의 도움을 받아 칭의의 관계론적
의미와 그 구조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는데, 사실 케제만(Käsemann, 1961)이 새 관점 학파
가 일어나기 근 20년 전에 이미 그의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근거하여 근본적
으로 같은 이해를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케제만(Käsemann)은 ‘의’를 근본적으로 관계론적 개념으로 보고 칭의의 관계론적 의미를
중시함을 넘어서, ‘하나님의 의’가 단순히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통해 죄인들
을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의인’의 신분을 내려 주시는 ‘선물’일 뿐 아니라, 그들을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의 힘’, 창조주가 타락한 자신의 피조물들을 자
신의 주권 아래로 다시 회복시키는 ‘힘’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케제만(Käsemann)
은 칭의를 무엇보다 ‘주권의 전이’(Herrschaftswechsel/lordship-transfer/lordship-change)
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칭의는 아담적 죄인들을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통해 사탄의 통치 아래서 해방
하여(여기에 죄 용서가 내포됨) 자신의 통치(하나님 나라) 아래로 이전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고 자신의 나라로 이전시켜 자신의 백성 만듦(구원의
은혜)은 이제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요구(윤리적 의
무)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의인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의’는 구원의 은
혜의 ‘선물’인데, 그 ‘선물’은 하나님의 주권의 주장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의인’ 되
게 하는 그 ‘선물’(사탄의 죄와 죽음의 통치로부터 구속하여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통치에
로 이전함)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의 주장을 내포하고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선물’은 ‘하나님/그리스도의 (구원의) 통치 자체이다’라고 말하거나, 믿는 자들에게 ‘선
물’(Gabe)과 함께 ‘선물을 주시는 이’(Geber)가 함께 온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의 ‘선물’은 ‘선물을 주시는 이’, 곧 주님과 뗄 수 없는 것인데, 그동안 너무나
많은 개신교도들이 왜곡된 칭의론에 오도되어 (의/구원의) 선물을 주시는 ‘주’를 의식하지
않고(즉, 그의 주권에 의지하고 순종하려 함이 없이) 단지 그 선물만 누릴 수 있다고 생각
하여, 은혜를 ‘싸구려 은혜’(D. Bonhoeffer)로 전락시키고, 의로운 삶이 없으면서도 ‘의인’이
라 자부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케제만(Käsemann)은 칭의에 대한 이와 같은 새 해석을 그의 스승 불트만(R. Bultmann)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