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0 - 칭의와 성화-김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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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함께 나오는 ‘부름 받은’이라는 구문에 나오는 과거 수동태 동사(‘부름 받았다’)는
일차적으로 믿음과 구원으로의 부름을 뜻하나, 그것이 소명된 곳의 의미로 쓰이는 ‘부름’
이라는 명사와 함께 쓰이니, 이차적으로 사명으로 부름(즉, 소명)의 뜻도 함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17절은 하나님의 부름이 ‘주께서 할당한 대로’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하
고 있으니, 소명의 뜻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으나, 이어지는 18절에서 그것을 또 구원으로
의 부름으로 부연하므로 그것도 구원으로의 부름이라는 뜻도 함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
니다. 24절에서도 우리는 부름이 구원으로 부름과 사명으로 부름을 둘 다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으로의 부름을 받은 신자 처녀들이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나,
되도록 그 독신의 처지에 남아 사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고전
7:25~40), 위와 같은 모든 신자에게 해당하는 일반적인 가르침을 먼저 천명합니다. 요지는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믿음과 구원으로의 부름이 임했을 때 각자가 있었던 처지를 하나님
께서 사명을 감당하도록 부른 처소로 보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계명들(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지키며 주를 섬기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하나님의 구원으로의 부름
이 임했을 때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삶의 자리를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감당하는 장으
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질서 속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 노예와
자유인의 구분이 없이 다 하나라는 복음의 대 원칙(갈 3:28)을 염두에 두고, 그들이 자신의
신분이나 처지를 바꾸려 하지 말고,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의 소명의 장으로 여기고 그곳에
서 주를 섬기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바울이 하나의 예외를 둡니다. 노예일 경우 자유를 얻을 수 있거든 그때는 그 기회
를 활용하라고 합니다(21절 하반). 어떤 학자들은 반대로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더라도,
차라리 [너의 노예의 처지를] 이용하라”라는 뜻으로 해석하는데, 저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봅니다. 여기 노예와 자유인의 구분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22절과 자신을 노예로 파는
당시의 일부 행태를 금하는 23절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영접하라고 하는 권면(몬 16)에서 우리는 바울이 당시 세
상의 노예제도를 근본적으로 사악한 것으로 보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복음의 대 원칙(갈 3:28)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그 사악한 제도를 공개적으로 비
판하고 노예해방을 부르짖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는 당시 로마제국의 체제에 대한 도전으
로써, 그런 주장을 하는 자는 스스로 다음 날 노예시장에 팔리게 되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
었으려니와, 당시 이제 겨우 싹이 튼 교회가 그런 주장을 한다 한들 실제적인 정치적, 사회
적 변혁을 이룰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비판적인 사람들은 당시 그 몇 안 되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메시아(왕),
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그들의 신앙 때문에 로마 황제에 대한 대역죄를 범한다고
의심받고 핍박을 받을 수 있어서 항상 살얼음판을 딛고 가듯이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
었던 상황을 무시하고 오늘 전 세계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교회의 상황처럼 상상하
면서, 노예해방의 구호를 명백히 외치지 않았다며 비판합니다. 일부 신학자들도 그런 비판
을 제기하는데, 그것은 정말로 경솔한 행위입니다.
당시 현실적으로 바울은 갈라디아서 3:28 등에서 하듯이 복음의 대 원칙을 천명하면서, 여
기 제가 해석한 대로 21~23절, 빌레몬서 16절 등에서 하듯이 노예제에 대한 부정적인 견
해를 은근히 나타내고, 교회 안에서는 상전들과 노예들을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서로를 형제로 사랑하고 섬기는 새로운 인간관계로 탈바꿈시키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