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1 - 월간사진 2018년 8월호 Monthly Photography Aug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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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통제 수단
그렇다고 몸을 기록한 사진이 만인이 평등한 세상을 이룩
해놓은 것은 아니다. 몸 사진은 19세기 유럽 강대국의 식
민정책을 유지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 식민지 원주민들
의 몸을 측정하거나 통제하는 데 사진을 사용한 것이다.
신체 옆에 팔, 다리 등의 길이를 측정할 수 있는 긴 자를
배치한 다음 전신, 반신, 정면, 측면으로 사진을 촬영했다.
몸 사진이 식민정책과 인종차별주의를 강화하는 수단이
극장용 포스터의 대가 나폴레옹 사로니(Napoleon Sarony)의 <Advertisement for Sarony's Photographic Studies>, 1880년
된 셈이다.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가 촬영한
‘남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남자’ 사진, 데이비드 베리
(David Barry)의 <레드 피시>(1885) 등이 대표적인 예
다. 이 외에도 몸 사진은 신원을 증명하고, 비정상적인 사
람을 분류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 사진에 기록된다는
것은 곧 관찰과 통제의 대상이 되는 것이었다. 객관성과
진실성을 담보한다는 사진의 신화가 사회적 통제 수단으
로 전치되는 지점이다.
사진과 몸의 결정적 만남 움직이는 누드의 태동
사진이 발명되기 전 초상화를 소유한다는 것은 자신의 사
비슷한 시기 에드워드 머이브릿지(Eadweard J. Muy-
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과 같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초
bridge)의 사진도 눈여겨봐야 한다. 그는 테오도르 제리
상화 하나를 제작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어마어마했기
코(Théodore Géricault)의 <엡솜의 경마>가 잘못된 그림
때문이다. 귀족만의 소유물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
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연속사진의 대부’다. 그런데 그가
다. 그야말로 부와 권력의 상징이자, 신분을 구별 짓는 수
집중한 소재가 ‘몸’이라는 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단 중 하나였다. 이처럼 초상화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
1885년 머이브릿지가 촬영한 사진은 당시 유행하던 누
내는 매체이자,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수단이었다.
드사진과는 결이 다르다. 여성성, 남성성보다는 태초의
그러나 사진이 발명된 후 사회 계급구조에 조금씩 균열이
인간을 탐구하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특정
가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 수준의
부위를 클로즈업한 사진이 아닌, 옷을 입지 않은 사람과
사람들만이 초상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다. 다게레오타입
동물이 움직이는 모습을 연속적으로 나열한 그의 사진에
의 비싼 제작비용 탓이었다. 한 장의 다게레오타입 초상
선 오히려 인체의 신비를 사실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사진을 위해선 오랜 노출 시간이 필요했고, 은판을 보호
하기 위해선 좋은 가죽을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특정 계
급이 초상사진을 독점하는 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노출 시간 단축, 복제 가능한 음화 발명 등의 기술 발전이
초상사진의 대중화를 이끈 것이다. 이로 인해 19세기 말
초상사진 스튜디오 숫자가 증가했고, 초상사진을 촬영하
는 인구 또한 늘어났다. 코닥(Kodak)의 설립은 초상사진
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 “당신은 찍기만 하세요. 나
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는 광고 문구와 함
께 누구나 손쉽게 다룰 수 있는 카메라를 생산했다. 이는
자신의 모습을 직접 촬영하는 사람들의 등장을 알리는 신
호탄과도 같았다. 이처럼 사진 기술의 빠른 발전 속도는
계급 간의 간극을 좁히는 기폭제가 되었다. 특정 계급이
아니더라도, 저렴한 가격으로 자신의 흔적을 사진에 남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움직이는 누드의 태동이 된 에드워드 머이브릿지의 <Animal Locomotion>, 18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