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 - 월간사진 2017년 8월호 Monthly Photography Aug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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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3_최종_월간사진  2017-07-20  오후 7:52  페이지 1






               Column 2


                                         역사로 보는 한국 초상사진



                  우리나라의 초상사진은 어떤 변화과정을 거치며 발전해왔을까. 초상화에 가까운 사진부터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인물사진, 개념을 강조한 인물사진까지.
                               우리나라의 초상사진 계보를 최인진의 <한국사진사>(눈빛)와 2013 서울사진축제 도록 <시대의 초상 초상의 시대>,
                                                   그리고 몇 편의 논문을 참고해 간략하게 정리해보았다.
                                                              에디터 | 박이현 · 디자인 | 서바른
































                               서양인 최초로 조선 국왕의 공식 초청을 받아 조선에 온 로웰이 촬영한 고종. 1884




               사진계의 얼리 어답터                                             한국인 최초로 사진을 접하고 또 찍었던 인물은 이의익이다. 1863년 그는 사절단 진하
               1839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서 ‘다게레오타입’을 발표한 이후 사진은 전 세계로 퍼져        겸동지사은사(進賀兼冬至謝恩使)의 정사(사신 우두머리)가 되어 베이징에 파견된다. 공
               나갔다. 그러나 아시아 국가들은 대부분 열외였다. 유럽과 미국에서 사진 문화가 전파되         식 일정을 시작하기 전 방문한 사절단은 러시아관(옛 고조서관)에서 사진을 처음 접하게
               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거리도 한 가지 이유였겠지만, 이보다 더        된다. 그곳에서 초상사진을 본 그들은 사진의 정교한 묘사에 매료됐고, 너나 할 것 없이
               큰 요소로 작용한 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아시아 국가들의 폐쇄적인 태도였다. 그나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이들은 우리나라 사진의 ‘얼리 어답터’이자 초상사진의 태동이었
               마 상대적으로 빠른 시기에 사진 문화를 받아들인 나라가 있었으니, 중국과 일본이다.          다. 제일 먼저 사진을 촬영한 이의익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중국에서는 청나라 말기 발발한 영국과의 제1차 아편전쟁(1840~1842)을 기점으로 사       “사진사가 탁자를 하나 설치했는데, 탁자 모양은 우리나라의 말안장과 같은 것이었다. 가
               진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그 대가로 난징조약(南京條約)을 체         로형의 나무 양 머리에는 파리(렌즈)를 부착했으며, 청색으로 된 보자기로 앞면을 가려
               결하게 된다. 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다섯 개의 항구를 강제적으로 개방해야만 했고, 그 결       두었다. 탁자 북쪽 편에 나를 앉힌 다음 움직이면 절대 안 된다고 지시하고 (…) 방 속에
               과 외국 상인들과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오게 됐다. 이때 함께 유입된 것이 사진술이다.        다시 들어갔다가 조금 후에 나와서 탁자 앞의 파리를 빼고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오래되
               일본은 네덜란드 상선에 의해 사진이 수용됐다. 1840년대 초인지 말인지 그 시기에 대        어 파리를 다시 끼운 후(…) 방안의 연등을 켜고 잠시 있다가 파리를 항아리의 물에 씻은
               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어용상인 우에노 순노지요우(上野俊之函)가 네덜란드 상선         후 곧바로 나와서 나에게 보여주는데 나의 전면이 파리에 옮겨져 있었다. 비슷한 것이 아
               을 통해 수입한 다게레오타입이 일본에 전래된 최초의 사진술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니라 완연한 내 모습이었다.”
               주지하다시피 1840년대의 우리나라는 상당히 폐쇄적이었다. 외국과의 통상교섭을 거
               절했고, 과학기술은 유입이 금지됐으며, 천주교는 박해됐다. 그러나 청나라와의 교류는          사진이 대중화되기까지
               어느 정도 유지했다. 그럼에도 사진술이 들어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진술 유         이렇듯 호기심 가득한 사신들이 초상사진을 찍긴 했지만, 그 결과물을 갖고 들어오는 것
               입에 비로소 숨통이 틘 건 1860년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흥선대원군이 강력한 쇄국정         까지 허락되진 않았다. 쇄국정책 때문이었다(1872년 사절단의 수석역관이었던 오경석
               책을 펼쳤던 시기였지만, 예전부터 지속해온 청나라와의 교류가 큰 역할을 했다. 아무나         은 중국에서 촬영한 자신의 초상사진을 가져오는 모험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1873년
               청나라와의 교류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공식 사절단에 선정돼야 청나라를 여         고종이 친정(親政, 임금이 직접 나라의 정사를 돌봄)을 선포하면서 문호를 개방하기에 이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른다. 우리나라에 사진술이 널리 알려지게 된 건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 수신사(修信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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