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5 - 월간사진 2017년 8월호 Monthly Photography Aug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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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3_최종_월간사진  2017-07-20  오후 7:52  페이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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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부부 초상, 1930년대, 사진아카이브연구소 소장
                                                                                 02 검정 외투의 남학생 초상, 충남 공주 문화사진관, 1920~30년대. 사진아카이브연구소 소장
                                                                                 03 김규진, 이희수 부부 초상사진, 천연당사진관, 1908년경, 사진아카이브연구소 소장







                  의 공로가 크다. 1876년 김기수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일본 사진관에서 초상사진을 촬        설된 사진관에서 주로 촬영된 것이 초상사진이었던 점에서 이를 유추할 수 있다. 사진관
                  영했고, 1880년 김홍집 역시 일본에서 전신상을 촬영했다.                       주인들 역시 중국과 일본에서 초상사진을 배워온 김용원, 지운영, 황철 등이었다. 당시의
                  물론, 쉽진 않았다. 외래 문물을 향한 배타적인 시선이 여전히 존재했고, 카메라에 대한        초상사진은 ‘전신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대세였다. 전통적인 초상화 양식과 크게 다르
                  선입견도 작용했다. 카메라를 대포 같은 무기로 생각하기도 했으며, 사진을 찍으면 영혼         지 않았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를 훼손시키면 안 된다는 유교적인 통념 때문이었
                  이 사라진다는 유언비어도 있었다. 그러나 상류계층과 신흥 부르주아 계급에서 사진을           다. 전신상은 곧 ‘살아 숨 쉬는 나’ 그 자체였다. 이러한 촬영 트렌드는 사진관의 개성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사진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           소도구를 이용한 촬영 방법이 퍼지면서 달라졌다. 점차 서양식 탁자와 의자, 화분, 책자
                  시 자신의 초상을 남기고 싶어 했다. 초상화보다 저렴한 가격이지만, 자신을 더 자세히 묘       등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신분의 고상함을 드러내기에 제격인 소품들이었다. 고위 계층
                  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건 1895년 실시된 단발령이었다. ‘신체발부수지부        뿐만 아니라 일반 계층에게도 인기가 있었던 것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얼굴 중심의 초상
                  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머리를 자르기 전 자신의 모         사진이 정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전신에 대한 강한 집념이 문제였다.
                  습을 온전히 남길 수 있는 방법으로 초상사진을 택했다.                          1920년대 캐비닛판(12x16cm)이라는 대중판이 일반화되고, 사진을 벽에 걸어놓는 일
                  초상사진의 영역도 확대됐다. 개인을 위해 사용된 것뿐만 아니라 가족행사, 장례식, 기념        이 늘어나면서 초상사진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사진관 내부가 점차 편안한 분위기로
                  식, 졸업식, 정부 기관에서 증거를 남기는 데 초상사진이 사용됐다. 평범한 사람들도 점        바뀌어 갔다. 음악을 트는가 하면, 긴 릴리즈를 이용해 대화 중 자연스러운 모습을 포착
                  차 초상사진에 관심을 갖기 시작됐다. 고종 황제의 공이 컸다. 그는 카메라 앞에 자주 섰       하기도 했다. 나라 안에선 전통적인 계급 질서가 붕괴되고 있었다(이미 김규진은 1907
                  으며, 그 앞에서 다양한 포즈를 선보였다. 초반에는 전통적인 어진(御眞, 왕의 초상화)과       년 천연당사진관에서 여성 전용 촬영장을 별도 운영했다). 초상화 스타일의 딱딱한 사진
                  비슷한 사진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고 친근한 사진을 선보였다. 이는 조선          은 과거의 유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사진사들은 외형보다 인물의 개성, 내면세계, 성격
                  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한 외교 활동 성격이 짙었다. 일종의 통치 수단으로도 사용됐다.        등을 묘사하는 데 집중했다. 신칠현의 ‘자화상’과 ‘몸’에선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사진
                  대중화된 고종 사진은 시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형식을 엿볼 수 있다. 미술사진이란 용어의 등장도 한 몫 했다. 렘브란트 조명 같은 빛의
                                                                          사용, 백금사진, 엷은 갈색 톤의 사진 등이 예술적 분위기를 강조했다. 신흥 부르주아 계
                  사진 세계로의 입문                                              층은 이러한 새로운 초상사진이 자신의 사회적 신분 상승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
                  이렇듯 한국사진의 출발은 초상사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80~1890년대 개        다. 놀랍게도 초상사진에 수정 작업(눈·코 성형, 불필요한 부분 삭제)이 이뤄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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