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6 - 전시가이드 2020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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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현 컬럼
(좌) 로버트 라우센버그, 들소 II(1964), 2019 경매 최고가 3위 (우) 동적 미로(1962) ⓒADAGP-ARS
에스프리 누보 고 있지는 않은가? 남들과 달라지는 것을 불안해하는 우리의 강박관념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화가이면서 사진가이고, 판화가이면서, 무대 미술
새로운 정신 가, 그에 더해 무용가이기도 한 로버트라우센버그는 이런 강박관념들 속 한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예술가는 꼭 그림을 그려내야만 하는가?” 그리고 그는
이 역발상을 통해 캔버스 위에서 그림을 비워내기 시작했다. 백색 페인팅은 하
글 : 김구현(AIAM 미술 경영연구소 대표) 얗게 칠한 캔버스들을 모아놓은 작품이다. 캔버스 위에는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지만, 관객들은 캔버스 위에 반사되는 조명과 드리워지는 그림자들, 그
들의 움직임에 따라 미세하게 변화하는 캔버스와 관객 사이의 공기 밀도와 입
2019년 5월 15일, ≪뉴욕 크리스티≫ 이브닝 경매장의 열띤 분위기가 정점을 자들을 느끼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지만, 무한히 많은 것들이
이루었다. 미국 현대미술계의 거장 로버트라우센버그의 1964년작 『들소 II』가 그려지는 캔버스는 고정된 실체가 없는 ‘공허’이자, 모든 것을 간직한 ‘영원’의
자그마치 8880만 달러(한화, 약 1027억원)에 낙찰된 순간이었다. 생생한 원 공간이다. 그는 존경하던 선배인 빌렘드쿠닝의 그림을 받아 6주동안 그가 그
색의 실크스크린이 작가의 이전 최고가의 거의 5배에 가까운 신기록으로 팔 렸던마릴린먼로를 지우기도 했다. 지워진 그림의 제목은 『지워진 드쿠닝의 그
려나간 것이다. 이 작품은 ‘2019년도 세계 미술시장에서 가장 비싼 가격으로 림(1953)』이다. 종이 위의 마릴린먼로는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곳에
거래된 미술작품’ 가운데 끌로드모네의 『건초더미』와 제프쿤스의 『토끼』에 이 존재했던 드쿠닝의마릴린먼로 그림과 드쿠닝이 그림을 그렸던 사실, 그것이
어 당당하게 3위에 랭크 되었다. 지워진 사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다. 라우센버그는 오히려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표현하고자 했다.백색 페
미국 텍사스주에서 태어난 로버트라우센버그는 젊은 시절, 티베트와 중국을 인팅은 당시 깊은 친분을 갖고 있었던 존 케이지가 『4분 33초』라는 기념비적
거쳐 베트남 등지를 여행하며 동양인들이 추구하는 내면적인 가치에 매료되 인 곡을 작곡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미디어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은 『필름을
었다고 한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삶의 지혜를 찾아나가는 위한 선』이나 『1962-64』라는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필름을
동양의 ‘선 사상’은 라우센버그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하루하루 같은 일상 위한 선』은 보란 듯이 필름 위에 아무것도 녹화되어 있지 않다. 그저 영사기가
에서 벗어나는 것을 갈망하면서도 두려워하며 어제와 비슷한 하루를 살아가 돌아가며 생긴 스크래치나 먼지들이 그대로 영사되며 시간의 흔적과 무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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