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1 - 전시가이드 2025년 05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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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갑. 월정사 초입. 15호.  oil on canvas                     2025년 4월 김원갑작가와 함께



            마에 작은 주점을 오픈하였다. ‘그림이 있는 사랑채’란 마음을 담은 ‘화사랑
            (畵舍廊)’이란 간판을 써서 걸었다. 일곱개의 테이블이 있는 작고 소박한 주      백마의 화사랑은 젊은이들의 명소로 정점을 찍고 있을 무렵 일산 신도시건설
            점 겸 카페였다.                                       이 본격화 되면서 문을 닫게 된다. 그 후 장흥으로, 다시 일산으로 옮겨지게 되
                                                            었다가 청년문화의 급변으로 화사랑은 사라졌지만 김작가의 여동생 애자 씨
            화사랑은 대학가와 80년대 초 젊은이들 간 신촌역에서 경의선 기차를 타고        가 운영하던 ‘썩은 사과’는 일산 신도시의 애니골이라는 음식거리에 편승하여
            출발하는 신 풍속도에 소문이 퍼져 문전성시를 이루게 된다. 옆 셋집들 마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썩은 사과’는 ‘초록 언덕’에서 ‘섬’으로, 다시 ‘숲속의 섬’
            져 한 칸씩 내보내며 공간을 확장해 나가던 화사랑은 1985년 불이 나서 순식     으로 상호를 바꿔가면서 살아남았다. 2017년 작고해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그
            간에 다 타버렸다. 김원갑작가는 화마가 스쳐간 그 자리에 80평짜리 독립 건      녀는 40년 넘게 ‘숲속의섬’을 지켜온 것이다. 2016년도 무더웠던 여름날 방문
            물로 화사랑을 다시 지었다. 화사랑의 전성기가 시작 되었으며 그 무렵 청춘       시 차분한 목소리로 차한잔 내주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2017년 애
            을 보낸 이들이 기억하는 화사랑은 대부분 불 난 뒤에 다시 지어진 지하가 딸      자 씨가 작고하기 전까지 숲속의 섬은 그 시절 백마역과 젊은 날의 화사랑을
            린 새로 지은 화사랑이다. 그져 주점이라기보다 문화가 공존하는 화사랑에서        그리워하는, 몇 안 되는 이들에게는 마지막 남은 추억의 저장소였다.
            는 누구나 통기타를 들고 무대 위에 오를 수 있었다. 지금은 가요계의 레젼드
            급인 윤도현, 강산에, 김장훈 등이 작은 무대지만 통키타 하나를 반주로 무대      화사랑을 기억하던 우상호의원과 이재준 당시 고양시장이 숲속의 섬을 지키
            에 오르기도 하고 당시 무명의 청년가수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창작의 밑젼        기 위해 의기투합하면서 1년여의 준비 과정을 거쳐 2020년 숲속의 섬을 고양
            을 마련하기도 했다.                                     시가 인수하게 된다. 우선 건물을 ‘고양시 상징건축물 1호’로 지정한 후 숲속
                                                            의 섬을 매입했다. 고인의 두 딸은 ‘갖고 있던 것은 아무 것도 팔지 말라’는 조
            백마역 철길을 따라 허허벌판 논둑길 옆에 서있는 화사랑은 당시 젊은이들의        건으로 숲속의 섬을 고양시에 넘겨주게 되었다. 고양시는 ‘숲속의 섬’을 ‘백마
            핫플레이스 였다. 경의선 열차를 타고 교외로 나온 젊은이들은 서울에서 떠        화사랑’으로 명칭하고 그 안에 화사랑의 기록을 보존하고 2025년 4월 평생교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해방감을 느꼈다. 80년대 암울했던 군부독재의 억압된        육 공간과 문화공간으로 재생시키고자 새로이 출발 하였다.
            사회분위기에서 잠시나마 자유로운 일탈을 즐겼을 것이다. 김원갑작가가 한
            껏 솜씨를 부려 연출한 토속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실내 분위기도 흥행에 한몫        “미안합니다. 기억이...”
            했다. 황토 바닥으로 시골집에 온 듯 친근감과 함께 천장은 짚으로 이었고, 투     20년만의 재회는 잊혀진 흐릿한 기억을 소환하며 더듬어 갔다.
            박한 원목의 의자, 테이블과 함께 어두운 실내에는 촛불을 켜놓고 드럼통으        “형님, 제가 ‘숲속의 섬’과 연이 닿아서요... 화사랑의 자료를 좀 더 구하고자...”
            로 만든 벽난로를 설치했다. 철사로 전등갓을 만든 뒤 붕대로 감싸 은은한 조      “그러게... 사진자료하나 가지고 있는게 없으니... 살아온바 세상에 영원한 것은
            명을 만들어 매달았다. 기차를 타고서 철길을 걸어서 찾아간 낭만적인 공간을       없더라구~” 김원갑 작가의 회상이다.
            보고 모두가 반했던 것이다.
                                                            김원갑작가는 청년시절부터 일구어온 화사랑의 전설을 뒤로 한 채 이제는 작
            화사랑을 알아본 건 이화여대 학생들이었다고 한다. 신촌역 인근에 모이던 인       업에만 전념하고 있다. 일요화가회의 회장을 역임하며 구상표현을 해오던 작
            문학 취향의 여학생들로부터 경의선 경험의 입소문이 빠르게 전파되면서 화         가는 최근 형태의 표현에 대한 자유로움을 찾고자 새로운 표현의 모색으로 천
            사랑은 대학생들 사이에서 낭만유행의 기준치가 됐다. 주말이면 경의선을 타        착하고자 한다. 눈에 보이는 시각이미지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표현의 시
            고 화사랑으로 향하는 젊은이들이 하루 1000여명이 넘었다고 한다. 80년대      각화를 위한 고민을 이야기 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더라’는 작가의 회상
            초중반 신촌역은 백마로 추억몰이 하려는 젊은이들로 발 디딜 틈 없었을 정도       이 삶의 무게에 대한 허무함 보다 이제는 작업의 열정으로 다시 채워져 새로운
            였다. 막차가 끊기기 직전 동동주의 취기를 머금고 백마역으로 뛰거나 막차 시      인생의 전성기가 창작의 결과물로 다가오게 되길 기도해 본다.
            간을 비밀로 하는 재미있는 모습이 추억되며 미소를 머금게 한다. 화사랑에서
            수용이 않 되어 넘쳐나 는 방문객이 주변으로 흩어지며 비슷한 주점들이 하나       ------------------------------
            둘 생겨나 일대가 유원지처럼 상권이 형성되었다. 이 중 ‘썩은 사과’는 지금은     참고자료. 문헌발췌
            고인이 된 김원갑작가의 다섯 살 터울의 여동생 김애자 씨가 운영하던 곳이었       김원갑 인터뷰. 2025년 4월 19일.
            다. 화사랑의 안살림을 도맡아 하던 여동생 김애자 씨는 오빠가 결혼하자 독립      문화일보. 박경일기자의 여행.
            해서 인근에 ‘썩은 사과’란 간판을 걸고 카페 겸 주점을 차렸다.            https://www.munhwa.com/article/11477316. 2025.4.20.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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