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6 - 전시가이드 2025년 05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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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과 컨템포러리 아트
광화문 홍예 천장의 봉황도
궁궐의 천장 단청에 그려진 봉황도 고 하였으며, 봉황이 산짐승을 먹지 않는 점에서 인과 덕을 갖춘 것이라 하여
황후의 덕목으로 여기게 된 것이며, 굳은 지조(志操)와 절개(節槪), 품위를 지
키는 새로 알려져서 뛰어난 사람을 상징하였다.
(鳳凰圖)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만큼 심하게 봉황을 신성시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구체
적으로 봉황을 신성시하였던 기록은 드러나지 않지만, 봉황이 천자를 상징하
글 : 박일선 (단청산수화 작가, (사) 한국시각문화예술협회 부회장)
는 새라고 인식하였던 점에서 조선 왕실이 중국 황실과 대등하다는 소중화(小
中華)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봉황은 자웅(雌雄)이 사이가 좋다고 하여서 남녀 간의 사랑을 상징하
봉황은 상서롭고 고귀한 뜻을 지닌 상상의 새로서 용, 거북, 기린과 함께 사령 였다. ‘봉(鳳) 가는 데 황(凰)이 간다.’ ‘봉이 나매 황이 난다.’라는 속담도 있
(四靈)의 하나로 신성시했다.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 하는데 형태는 듯이 사랑하는 남녀 관계나 천생연분(天生緣分)을 의미하였다. 순우리말로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었다. 봉황은 새 중의 왕이요, 모란은 꽃 중의 왕이요, 호 는 아시, 안시, 아시새라고 하는데 산해경에서 '모양이 닭과 비슷한데 오채색
랑이는 백수의 왕이라는 말이 있듯이 봉황은 모든 새의 우두머리로 여겨지며 의 무늬가 있고, 부르기를 봉황이라고 한다.'라고 봉황의 형상을 닭에 비유하
귀중하게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였다. 그래서인지 봉황의 외견을 꽁지가 긴 닭이나 공작새, 특히 금계와 비슷
하게 묘사했다.
봉황의 모습은 앞은 기러기, 뒤는 기린, 목은 뱀, 꼬리는 물고기, 황새의 이마,
원앙새의 깃, 용의 무늬, 호랑이의 등, 제비의 턱, 닭의 부리를 가졌으며, 오색 대중 음악에서도 봉황에 관련된 노래가 있는데 1970년대에 남성 듀엣 투코리
(五色)을 갖추고 있다고 하여 상서롭고 아름다운 새로 인식되었다. 봉황은 닭 안스의 김도향과 손창철이 불렀던 벽오동이다.
을 비롯하여 상서로운 의미를 가진 여러 동물을 모아서 상상력으로 만든 동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잣더니
물이라 생각된다. 어이타 봉황은 꿈이었다 안 오시뇨
달맞이 가잔 뜻은 님을 모셔 가잠인데
중국에서는 용을 황제에 비유하고, 봉황을 황후의 상징으로 여겼다. 옛 문헌에 어이타 우리님은 가고 아니오시느뇨
봉황은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나와 사해(四海)의 밖을 날아 곤륜산(崑崙山)을 하늘아 무너져라 와르르르르르르....
지나 지주(砥柱)의 물을 마시고 약수(弱水)에 깃을 씻고 저녁에 풍혈(風穴)에 잔별아 쏟아져라 까르르르르르르....
서 자는데, 이 새가 세상에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안녕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잣더니
중국에서는 봉황을 성천자(聖天子)의 상징으로 여겼으며, 성군(聖君)의 덕치 어이타 봉황은 꿈이었다 안 오시뇨'
(德治)에 비유하여 천자가 거주하는 궁궐에 봉황으로 장식하였다. 라고 봉황과 벽오동에 대한 가사가 반복된다.
고대 황제(黃帝) 시대에 '봉황이 동원(東園)에 머물러 해를 가리었으며 항상 죽 봉황은 새 중의 으뜸이며 고귀하고 상서로움을 나타내어 단청이나 건축, 공예
실(竹實)을 먹고 오동(梧桐)에 깃들인다'고 하였으며, 요(堯)·순(舜)·주(周) 시 등 다방면에 두루 쓰였으며, 우리 생활 속에서 고귀한 것을 비유할 때 상징적
대에도 봉황이 나타나서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봉황은 주로 궁궐 단청에 쓰였으며, 두 마리를 그리
면 쌍봉도(雙鳳圖)라 불렀다. 대체로 암수 한 쌍의 봉황을 다정하게 그렸으며
장자의 추수(秋水) 편에 '봉황은 벽오동(碧梧桐)이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벽오동, 대나무 등과 오색구름을 배경으로 신비롭게 표현하였다. 또한 도상은
열매인 연실(練實)이 아니면 먹지 않고, 예천(醴泉)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닭의 얼굴에 목이 긴 공작의 몸으로 표현하면서 화려하게 그린 꼬리로 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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