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5 - 전시가이드 2020년 9월호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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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권 컬럼
감모여재도, 62×85cm, 조선민화박물관 소장
민화 시원의 직접적인 영향, 한 의미를 터득했다.”는 기록과 함께 “가까운 친척들에게 조상으로 모시게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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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檀君 그림〉 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 이규보 저, 『동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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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국집東國李相國集』 에는 “무당이 백가自家의 신당神堂 방벽防壁에 단청丹
靑으로 그린 신상神像을 가득히 걸어놓고 장구를 치고 가무歌舞를 한다.” 라
글 : 김용권(겸재정선미술관 관장) 고 적혀 있는데, 아마도 신상 중에는 〈단군 그림〉이 함께 걸려 있었을 것으로
충분히 짐작된다.
시대가 더 내려온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단군 그림〉에 관한 흔적은 아주
민화 시원은 우리 민족 고유의 문배 풍습 외에도,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단 쉽게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조선의 세종 때 평양에 단군사당을 지어 〈
군 그림〉, 〈처용랑 그림〉, 〈비형랑 그림〉과 부적 사용, 병풍 사용 등과 직접적 단군 그림〉을 국조로 숭배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또한 조선 초기의 『
인 영향 관계를 맺고 있다고 했었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살펴 동국여지승람』에는 팔도 각 읍에 사직당社稷壇, 성황당城隍堂, 려단厲壇 등
보고 넘어가고자 한다. 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짐작컨대 이와 같은 사직당, 성황당 등에서
먼저 〈단군 그림〉에 대해 살펴보면, 『삼국사기』,『삼국유사』 에는 6세기 신라 도 〈단군 그림〉이 의례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본다. 오늘날의 서울 국사
24대 진흥왕(540~576) 때의 화가 솔거가 그린 〈단군 그림〉에 관한 기록이 당國師堂을 비롯한 각 지역 무당집에도 〈단군 그림〉이 걸려 있는 것을 심심
나온다. 이른바 『삼국사기』,『삼국유사』 에는 솔거가 꿈에서 본 단군의 얼굴을 치 않게 목격하게 된다.
천여 장 남짓 그려 그것을 신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붙이도록 했다고 적 이상과 같이 신라 시대 솔거에 의해 표준화된 〈단군 그림〉이 벽사적인 상징
혀 있다. 성을 담고 대대세세로 줄기차게 전승되어왔으며, 결국 조선 후기에는 민화
바로 이와 같은 〈단군 그림〉이 민화의 뿌리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되다. 8세 로 변모되어 일반 여염집에까지 걸리게 되었다는 것을 새삼 이해하게 된다.
기경 대야발大野勃(생몰년 미상-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동생)이 쓴 『단기고
사檀奇古史』에도, “기원 일천여년 전에 이미「단군 영정」을 그려 신전에 봉안
했다.” 라고 적혀 있다. 1) 1) 김태곤 편, 『韓國巫神圖』p.53. 悅話堂. 1993. 서울.
계속해서 시대가 내려온 고려 중엽의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쓴 『동사 2) 박용숙 저, 『韓國美術의 起源』 p.122 재인용. 예경. 1991. 서울.
유고東事類考』에도 “솔거가 〈단군 그림〉 천 본을 그린 후 그림에 대한 심오 3) 「노무편老巫篇 병서幷序- 丹靑滿壁通神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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