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7 - 전시가이드8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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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타 치하루, 잃어버린 단어들, 2017년, 베를린 성 니콜라이 키르체 성당 ⓒMichael Setzpfandt
웃집에 불이 났었다고 한다. 다음 날, 그녀는 그 집에 들어가 새까맣게 타버린 의 유기체로서 호흡한다. 시오타는 때때로 퍼포먼스 작품을 통해 그녀 스스로
피아노 한 대를 발견하게 되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악기에 영감을 얻어 작 를 공간 속에 밀어 넣기도 한다. 그녀 자신을 그 거미줄에 묶어 넣어 마치 거미
품을 시작했다고 한다. 어릴 적 기억으로 시오타는 그랜드 피아노 한 대를 불 가 스스로가 엮은 올가미에 걸리듯,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기 어려운 그런 상
에 태워 남은 조각들을 검은 실에 엮어 설치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심리학에 황을 연출하는 것이 특징이다.
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식이 바다 위에 보이는 빙산이라면 무의식은 바
다 밑에 있는 거대한 빙산이라고 한다. 무의식, 즉, 존재하지만 겉으로 드러나 한국에서 처음으로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시오타 치하루의 기획전이
지 않는, 그래서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의식의 세계를 시오타는 끄집어내 코로나 팬더믹 상황에서도 4월19일 성황리에 종료되었다. 이번 『시오타 치하
고 또 끄집어낸다. 그녀는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켜 풀어내기조차 힘든 무의식 루: 영혼의 떨림』 릴레이 전시회는 ≪부산시립미술관≫과 일본 ≪도쿄 모리미
의 세계를 마치 거미가 줄을 뽑아내듯이 표현한다. 그녀의 설치 작품들을 보 술관≫이 공동으로 주최하였다.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에서 시작된 이 전
자. 의식, 무의식, 잠재된 감정들의 파편들을 거미줄처럼 엮어 공간 전체를 휘 시회는 2019년 6월부터 4개월여에 걸쳐 관람객 60만명을 넘어선 말 그대로 ‘
어 감고 물건들을 감싸 안는다. 수백 켤레의 신발부터 수백 개의 여행 가방까 뜨거운 전시’ 였다고. 공교롭게도 그녀의 배우자가 부산 출신이라고 한다. 부
지 그녀만의 거미줄로 집어삼킨다. 그녀에게 공간은 캔버스 그 자체이며, 감 부가 함께 현재 베를린을 주무대로 활동하며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다가, 부
정을 분출하는 통로처럼 보인다. 그녀의 거미줄은 우리 몸의 뉴런처럼 공간 산에서 개최된 전시회를 앞둔 시점에서 하필이면 일본과의 외교문제가 날로
과 물체를 하나하나 엮는다. 이렇게 반복되는 과정에서 시오타 치하루에게는 심각해지자 무척 가슴 졸였다는 후문이다. 이에 ≪부산시립미술관≫ 관계자
‘거미여인’이라는 별명이 붙여진다. 여기서 낡은 벽걸이 천을 손보느라 늘 바 는 “단절된 상황 속에서 관계성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시오타 치하루 기획
느질에 몰두해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루이스 부르주아가 떠올린 <거미>와 전은 개인의 존재에 관한 성찰과 새로운 관계성을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
비교해 보자. 루이스 부르주아는 거대한 <거미> 조각상을 만드는 것으로 널 라고 문화적 신뢰와 의미를 한층 강조했다. 지칠 줄 모르는 시오타 치하루의
리 알려진 예술가다. 루이스는 낡은 벽걸이 천을 복원하는 일을 하는 집안에 열정에 힘입어 무사히 부산전시회를 마치자마자 그녀의 ‘개인초대전’이 파리
서 자랐다. 어린 루이스에게 수많은 벽걸이 천을 보여 주며 다양한 종류의 색 ≪다니엘 탕플롱 갤러리≫ 에서 7월 25일까지 이어졌다. 시오타는 가족의 죽
깔과 짜임에 대해 가르쳐 주신 분도, 천을 물들이는 법을 알려주신 분도 모두 음을 직면한 후 무언가를 기억하고 간직하기 위해 매일 사람의 온기와 접촉하
엄마였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루이스는 엄마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며 기억을 축적한 열쇠들을 모아 자신의 작업과 연결시킨다. 작품 제작을 위
담아 거대한 거미 조각상을 만들고 조각상에 엄마를 뜻하는 『마망(엄마)』이라 해 인터넷 광고를 냈을 때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이 열쇠를 보내왔고, 때
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생물학적으로도 거미는 모성애를 상징한다고 한다. 로는 열쇠에 담긴 사연을 적은 편지도 동봉해 왔다. 그러니까 그가 모은 열쇠
거미는 자식들의 먹이로 자기 몸을 내주거나, 다른 동물이 자식들을 해칠 것 는 단순히 쓸모를 다한 물건이 아니라 18만 명의 소중한 기억과 이야기를 간
같으면 역시 몸을 던져 자식들을 구한다나. 루이스는 바로 이런 ‘거미’의 형상 직한 오브제인 것이다. 아무쪼록 우리 미술인들 역시, 현실적으로 무척 견디
으로 평생 모성애를 담은 작품을 만들었다. 루이스 부르주아가 ‘거미’라는 외 기 힘든 ‘코로나 불황’의 와중에서,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
형 속에 감춰진 ‘감성’을 표현한 반면에, 시오타 치하루가 연출한 공간은 하나 (Memento mori)>의 ‘새로운 정신’에 의해 부활하기를 간절히 소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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