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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과 컨템포러리 아트
명성황후, 330x200cm, 종이위에 채색, 1984
오방색과 단청을 사랑한 작가(1) 으로써 더욱 환상적이며 신비롭고 장엄한 분위기를 조형화하였다. 특히 얼룩
박생광 진 것처럼 채색한 기법은 마치 오래되고 퇴색된 단청에서 볼 수 있는 고색창
연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며, 단청의 문양을 데포르메(déformer)함으로써 새
로운 조형적 시도를 통하여 현대적인 감각을 돋보이게 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은 1977년과 1981년을 기준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단청을 소재로 한 작
글 : 박일선 (단청산수화 작가)
업의 초기에 해당하는 1977년 작품인 '단청기둥'에서는 휘채색법을 생략하지
않고 단청 머리초의 구성요소인 인휘(人暉)의 초빛, 2빛을 그대로 사실적으로
오방색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색으로서 전통적으로 단청이나 불화, 민화, 무 표현하였으며, 같은 시기의 또 다른 작품인 '토기와 단청', '단청' 등에서도 변
속화 등에서 많이 사용되어 왔으며 오늘날 현대 회화에서도 많이 쓰이고 있다. 화의 특징이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1981년 이후부터의 작품에서는 이
현대 회화를 하는 작가중에도 오방색을 즐겨 사용한 사람들은 손꼽을 수 없이 러한 특징이 만개하였음을 볼 수 있는데 1981년 '꽃기둥', '꽂기둥2' 등의 작품
많겠지만 각별히 오방색을 아끼고 사랑한 작가로는 내고 박생광(乃古 朴生光, 과 1984년 '꽃가마', '금산사의 추녀', '무위사의 관음', '무당1', '무당2' 등에서 잘
1904~85)을 제일 먼저 꼽고 싶다. 드러나 있다. 이후 죽음을 앞둔 1년 전인 1984년부터 '명성황후','전봉준' 등 역
사적인 소재를 그린 작품에 이르러서는 그 특징이 절정에 다다른 느낌을 준다.
'한국 미술의 채색 전통의 부활'을 이끌며 오방색과 한국적 이미지를 상징하는
단청을 본격적으로 현대 회화의 경지로 끌어올린 가장 대표적인 작가인 그는 ' 누구보다 생전의 박생광을 잘 알고,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이영미술관 김이환
샤머니즘의 색채와 이미지, 무당, 불교의 탱화, 절간의 단청, 이 모든 것들이 서 관장은 '내고(乃古, 박생광의 호) 그림의 색은 빨강, 노랑, 파랑에 하양과 검정
민의 생활과 직결되는 그야말로 그대로가 나의 종교인 것 같다.' 라고 말하면 이 뼈대이고 중간색으로 녹색이 끼는 정도이다. 그 빛깔이 먹과 청색으로 더
서 '불화나 무속을 많이 다루고 작품 자체가 전통적인 동양화 채색법을 떠난 죽기도 하고, 덜 죽기도 하는 베리에이션이 있을 뿐 주조에는 변함이 없었다.
생소한 것이라 나를 기인처럼 여기거나 환속한 중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 간단히 무당색으로 일컬어지고, 단청색, 탱화색으로 불리는 빛깔이다......그러
요. 그러나 나의 채색은 화조나 산수를 하던 초기부터 병행해 오던 것이고 한 나 나에게는 어디까지나 내고색(乃古色) 이다. 단청도 탱화도 아닌 아무도 흉
국의 전통미술 가운데서 그런 극채색의 소재를 찾다 보니까 단청과 탱화의 기 내 낼 수 없는 내고색이다.'라고 찬탄하였다.
법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라고 언급하며 단청과 불화, 무속 신앙인 굿에서 우 또한 오광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은 '민화와 불화, 무속화 등에서 찾아낸 단청
리 민족의 정서와 정체성, 그리고 우리 민족이 지니고 있는 신명의 아름다움 의 화려한 빛깔로 우리 채색화의 앞날에 주술적인 힘을 불어넣고 우리 색의 정
을 찾았다. 그의 나이가 노년기에 접어든지도 한참 된 1981년 이후에 단청을 체성을 찾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던 이'라고 평을 하였으며, 채색화로서 새로운
소재로 그린 작품을 살펴보면, 단청의 표현기법이자 특징인 휘채색법(grada- 한국화의 세계를 개척한 '민족혼의 화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tion)을 생략함으로써 오방색의 색상이 더욱 강렬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또
한 단청에서 쓰이는 문양의 바깥쪽에 둘레선을 긋는 먹기화(검은선)와 시분( 며칠 전 7월 18일은 박생광 타계 35년째가 되는 날이었다. 그가 말년에 거주
흰선)과 같은 윤곽선을 경면주사의 주황색을 써서 두껍고 강한 선으로 표현함 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작업하다 돌아가신 수유동 집을 찾아 보았는데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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