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0 - 전시가이드 2022년 01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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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과 컨템포러리 아트




























        선운사 만세루 전경











        선운사 만세루                                         칸이나 7칸 정도의 규모를 넘지 않으며 이와 같은 9칸 규모는 거의 찾아 보
                                                        기 힘들다.

        글 : 박일선 (단청산수화 작가)
                                                        다음으로는 건물의 가운데 3칸은 앞뒤 외곽기둥 위에 대들보를 얹고, 좌우 각
                                                        3칸에는 가운데에 각각 높은 기둥을 세워 양쪽에 맞보(合樑, 가운데 기둥을
                                                        중심으로 양쪽에 설치된 보)를 거는 방식을 취한 점이다. 하나의 건물 내부에
        선운사(禪雲寺)는 기암괴석이 많아 호남의 내금강이라고 불리는 전라북도 고        서 두 가지 방식으로 보를 걸어 구조의 안전을 확보하면서 누각의 중앙 공간
        창군 아산면 삼인리 도솔산(兜率山) 아래에 자리 잡고 있으며, 577년(백제 위    을 확장한 특징이 있다.
        덕왕 24년)에 검단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는 천 년 고찰이다.
        경내에 들어서니 차가운 12월 날씨와 코로나 확산 때문인지 한산하기만 하다.      또한 가운데 칸 높은 기둥에 얹져 있는 종보(宗樑, 대들보 보다 높은 곳에 설치
        어느 사찰에 가든지 제일 먼저 눈여겨볼 전각은 대웅전이지만 이곳에서 가장        되는 보)는 한쪽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목재를 이용하였다. 일부러 가공한 것
        먼저 눈에 들어온 전각은 대웅전 앞에 떡 버티고 서 있는 기다란 만세루(萬歲      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둘로 갈라진 나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였다.
        樓)였다. 만세루는 주로 법요식(法要式)을 거행하거나 불법을 배우는 승려들       그 갈라진 나무의 끝 부분에도 용과 봉황 같이 보이는 형상을 조각까지 한 점
        의 강의장으로 쓰였던 공간으로 절에 따라 중생을 두루 제도한다는 뜻을 지닌       이 매우 기발하다. 현대미술 작가들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의 설치미술 작품
        보제루(普濟樓)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처럼 보이는 천장을 바라보면 마치 춤을 추는 듯하게 보이는 대들보와 서까래
                                                        로부터 압도 당하는 느낌이 든다.
        만세루의 창건에 대해서는 검단 선사가 선운사 대웅전을 짓고 나서 남은 목
        재로 지었다는 설도 있고 고려시대의 건물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선운사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사찰 누각은 시대의 흐름과 기능에 맞추어 그 구조를
        에 전해지고 있는 「대양루열기」(1686년)나 「만세루 중수기」(1760년)에 따르  적절히 변용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그 당시 목재 등 건축자재를 구하는데 어려
        면 1620년(광해군 12년)에 대양루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가 화재로 소실된      움이 많았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오히려 더 독창적인 구조의 건축물을 만들
        것을 1752년(영조 28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중층 누각의 구조    었던 점에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였으나 다시 지을 때 정면이 옆으로 상당히 긴 9칸 규모의 단층 건물로 바뀌
        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조선 후기에 사찰 공간의 변화로 나타났는데 비       만세루의 단청을 살펴보면 유교 단청을 대표하는 가칠단청을 하였다. 유교단
        록 누각이라 할지라도 법당과 동일한 공간으로서 다목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청은 조선 시대의 유교 시책으로 인하여 종묘나 성균관, 사당 등에 쓰이는 새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로운 형식으로 탄생하였다. 사치스러움과 화려함을 배격한 가칠단청이 그 중
                                                        심이 되었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를 탄압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청은 오히
        만세루의 특징이라고 하면 현존하는 사찰 누각으로서 가장 큰 규모인 정면 9       려 유교단청, 궁궐단청, 불교단청으로 더욱 발전하고 화려하게 꽃피운 시기였
        칸이라는 점이다. 사찰 누각은 대체로 정면이 3칸 정도이고 크다 하더라도 5      다. 개국 초기 한양을 수도로 정하며 새로 세운 궁궐에는 모두 단청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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