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7 - 전시가이드 2024년 07월 이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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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Bernard Peltriaux, Spider Queen's Shopping, 73 x 60cm, oil on canvas, 1990 ⓒADAGP
                                                   (우)장도현, Lonely spider queen’s palace, 162.2 x 130.3cm, acrylic on canvas, 2024 ⓒADAGP






            러져가는 분위기가 무르익자, 갑자기 이 세상을 거쳐갔던 보통 사람들에 대        계층 10%에게 국부의 80~90%가 집중되어 있다는 역사의 모순점을, <완곡
            한 특별한 관심이 샘솟듯 생겨났다. 이를테면 장도현 작가는, 역사와 시간이       한 미학>으로 상쇄시킴으로써 시대의 오류를 극복하려고 시도한『반어적 기
            라는 캔버스 위를 거쳐간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 크든 작든 직간접적으로 의       법의 풍속화』가 아닐지 싶다.
            미가 있고 아름다운 발자국을 남겼다는 각성을 한 셈이다. 이쯤에서 필자는, ‘
            거미’에 대한 관점이 장도현 작가와는 대척점에 서있는 프랑스 북동부 랭스        결론적으로, 〔AIAM국제앙드레말로협회〕 회원 작가들 가운데서도 장도현 작
            출신 글로벌 거장인 베르나르 펠트리오(Bernard Peltriaux)를 소개한다. 그  가는 작가는 신화적 상징성이 크고 구조적으로 미학적인 ‘거미줄’을 사용하여
            가 태어날 무렵, 즉 제1차세계대전이 종료된 시점에서 파리를 중심으로 전 유      힘의 주제를 표현해오기도 했다. 거미줄은 무기물지만 생성 과정에서 곤충인
            럽을 휩쓸었던 소위 ‘광란의 시대(Années folles)’로 대변된 1920년대의 퇴폐  유기체가 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순수 무기물과 다르다고 할 것이다. 즉 거
            적인 사회상을 묘사하면서, 전쟁의 서곡이 울려 퍼지기 전까지 ≪벨 에포크        미줄은 거미라는 창조적 힘의 주체가 그 힘을 드러낸 극적이고 상징적인 소재
            (1880~1914년)≫ 라 인구에 회자되며 ‘식민지 시대’의 풍요로움을 고스란히   인 것이다. 작가는 일련의 ‘거미줄’ 작품에서 빈 공간적 배경과 대조적으로 다
            향유하던 낭만적인 모습의 여인들을 빗대어 풍자한 작품들로 유명하다. 그러        양한 색상을 사용하여 다차원적인 선들을 교차하게 한다. 이러한 유기적인 구
            나 정작 그 ‘풍요’의 내막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일부 특권층에 국한됨으로      성은 창작의 심미성과 신비성을 더해주고 있다. 장도현 작가는 본문에서 거론
            써「사회적 불평등도」는 과거에 비해 줄기는커녕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까지     한 작품 외에도 다른 중요한 작품들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작가는 자연 존재
            늘어만 왔다는 것을 입증한다. 특히, 사회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17세기부       물이나 생물체를 소재로 공통 주제인 ‘힘’의 의미와 특징들을 표현하고 있다.
            터 전해지는 프랑스의 상속문서와 여러 자료들을 토대로 분석한 바에 의하면        그리고 현재 그가 그리고 있는 발자국들은, 아마도 어떤 측면에서는 작가 자
            ≪벨 에포크≫ 시대때가 정점이었다고 하며 1900년대 기준으로 프랑스 상위       신의 창조적 고뇌를 은유적으로 작품화하고 있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1%가 차지하던 전체 부의 점유율은 55%에 근접한다. 심지어 파리의 경우는,     이다. 이에 반해, 베르나르 펠트리오의 작품에 등장하는 ‘거미줄’은, 사회의 약
            상위 1%의 점유율이 1910년 기준 68%에 근접했다는 통계도 있다. 이러한 ‘사  자 모두가 거미처럼 ‘먹이’감을 노리고 허겁지겁 달려들어 들이대는 ‘탐닉의
            회 계층간 불평등’의 문제점은, 비단 프랑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기에, 결      손’에 가깝다. 이는 오직 자신의 노력으로 일군 ‘힘’에 의해 쟁취한 ‘진정한 풍
            과적으로 전 유럽 제국에서 착취당해왔던 하층의 노동자들은 하루에 십 수시        요’가 아니라, 오히려 화폭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구심점이 저급한 취향의 마
            간에 달하는 노동과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돈        초 남성이 던져준 자본의 ‘힘’에 굴복한 쿠르티잔(고급 매춘부)의 서글프면서
            은 푼돈에 불과했다. 이는 사회주의 운동의 원인이 되기도 하여 러시아 등지       도 웃픈 ‘자기 과시욕’에 포커스를 맞춘 형국이다. 무척 공교롭게도 100년전과
            에서 ‘반정부 혁명’과 뒤이은 러시아 제국의 전복 등으로 나타난다. 종전이 되     유사한 ‘팬데믹’이 한바탕 세상을 휩쓸고 간 현시점에서, 과연 우리 예술인들
            자, ‘남성 노동자’들은 그나마 ≪벨 에포크≫ 이전 시기보다는 대우가 좋아지      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시의적절한 메시지를 던
            고 사회적 인식이 향상된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그 이전 시대와 견줘 나아      져야 할 것인지, 또한 만일의 경우 우리 당대에서 예술이 사회를 주도하고 움
            졌을 뿐 여전히 절대적인 삶의 질 개선은 미미하고 매우 열악한 수준이었다. ‘     직이게 만드는 ≪벨 에포크≫가 다시 도래한다면, 어떤 종류의 꿈들이 실현
            여성 노동자’의 경우에는, 남성 노동자 못지 않게 노동력의 많은 부분을 차지      가능할지 궁금해진다. 아무쪼록 장도현 작가 역시 베르나르 펠트리오와 마찬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들의 임금은 낮았고 그들의 노동 역시 하찮게       가지로〔ADAGP 글로벌 저작권자〕로 등재된 이상, ‘사회적 불평등’이 점차적으
            취급되었다. ‘아동 노동자’ 또한 이전보다는 법령상 보호규제를 받을 수 있었      로 창궐하는 세상을 향해 ‘관심의 은유’라는 따스한 손길을 기꺼이 내미는 동
            지만, 여전히 높은 강도의 노동과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혹사당했다. 바로 이      시에 ‘새로운 정신’을 독창적으로 실천하는 작가로 살아남기를 기대해 본다.
            러한 시대상을 묘사한 베르나르 펠트리오의 작품은, 1789~1914년까지 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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