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4 - 전시가이드 2021년 09월호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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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과 컨템포러리 아트




























        나주향교 대성전 전경









        나주에서 단청을                                        나주 향교는 제향을 올리는 대성전을 앞에 두고, 강학을 하는 명륜당을 뒤에
                                                        두는 전묘후학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의 장원봉
                                                        아래 평탄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서울 성균관의 배치법과 동일한 형태를 취
        생각하다...나주향교                                     하고 있다.

                                                        대성전은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는데 현종과 숙종 때 중수, 중건
        글 : 박일선 (단청산수화 작가)                              이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때 대성전이 중수 된 것이 아닌
                                                        가 싶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한 목조건물이다. 주심포
                                                        계 건물임에도 쇠서의 형태가 익공과 비슷하게 변형되고 기둥 사이를 가로 지
                                                        른 창방 위에는 화반을 놓은 익공 수법이 절충되어 있다. 건물 내부는 트여 있
        나주를 대표하는 문화재이며 나주의 자부심인 건축물로는 나주향교(羅州鄕          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으며 공자를 비롯하여 안자, 증자, 자사, 맹자
        校)가 있다.                                         등 4성(四聖) 및 공문 10철(孔門十哲), 송조 6현(宋朝六賢)과 우리나라 18현의
        나주는 약 천년 동안 목(牧)의 지위를 유지하며 호남에서 전주(全州)에 버금      위패가 모셔져 있다. 건물 앞쪽 주춧돌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어서 검소
        가는 중심 도시였고 이에 걸맞게 향교의 규모 또한 컸다. 창건은 987년(고려     하고 소박함을 중시하는 유교 건물로서는 다소 이색적인 느낌이다. 이 때문
        성종 6년) 전국 12목에 향교를 설치할 때 되었고 1398년(태조 7년)에 중수되  에 조선 시대의 불교 탄압정책으로 없애 버린 사찰의 주춧돌을 가져다 썼을
        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건물은 계단이 양쪽으로 설치되어 있는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지붕골이 깊
        근대에 들어서는 나주가 호남의 중심 도시에서 위상이 격하되는 쓰라림과 함        고 기둥 사이의 간격이 넓어서 대성전으로서의 위엄과 장엄함이 느껴진다.
        께 나주향교도 여러 차례 큰 아픔을 겪었다. 1900년대에 사마재, 수복청, 양사   단청을 살펴보면 부연에는 매화점, 연목에는 연화문, 도리와 창방, 평방에는
        재 등이 헐렸고 1920년대에 서재와 충복사가 헐렸으며 1952년에는 동무, 서    병머리초와 관자머리초를 하였다. 궁궐단청에 준하는 모로단청을 한 것이 마
        무, 동재 등이 모진 수난을 겪었다.                            치 꽃단장을 한 느낌이다. 성균관의 경우에는 대성전이나 명륜당이나 모두 유
        이후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몇 차례에 걸쳐 헐렸던 건물들을 복원하고        교의 가치인 검약을 상징하는 간소한 가칠단청을 하였고 나주향교에서도 대
        보수하였으며 1981년 대성전과 동재, 서재를 보수하고 담장을 개축하여 지금      성전 뒤편에 위치한 명륜당에는 가칠단청을 하였는데 대성전의 모로단청은
        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조선 시대에 유교를 신봉하던 선비는 사치와 화려함을 배격하고 청렴과 검소
        향교는 공자(孔子)와 중국 및 우리나라의 선현에 대한 제사를 올리는 문묘의       함을 추구하며 문인화나 사군자를 치는 수묵화를 예술의 근본으로 삼았기에
        공간인 대성전(大成殿)과 경전을 공부하는 강학의 공간으로서 명륜당(明倫         화려한 채색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수묵화는 단청에서 가칠단청에 해당하고
        堂)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 두 개의 공간이 향교의 핵심을 이룬다. 이러한 대     채색화는 모로단청이나 금단청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유교의 성현에 대
        성전과 명륜당을 배치하는 데에는 평지일 경우 전묘후학(前廟後學), 경사진        해 제향을 올리고 경전을 학습하는 향교 건물에는 가칠단청을 해야 함이 마
        터일 경우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땅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칠단청을 하지 않은데에는 필시 무슨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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