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0 - 전시가이드 2021년 05월호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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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과 컨템포러리 아트






































            황궁우 전경



        소공동 환구단 터에서                                     신과 지신, 그리고 해와 달, 별 등 여러 신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천(祭天)의식
                                                        을 행하던 건물이다. 황제의 위엄을 한껏 높이기 위해서 돌난간을 두른 화강암
                                                        기단 위에 3층의 팔각 정자로 호화스럽게 지었으며 1·2층은 통층 구조로 중앙
        단청을 생각하다                                        에는 태조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 청나라풍이 스며든 조선 말기의 건축으로
                                                        1층은 부연만 갖춘 홑처마인 반면 2·3층은 겹처마를 하였으며 사래 끝에는 다
                                                        른 궁궐 건물에서도 볼 수 있는 청동 토수가 끼워져 있다. 건물 내부의 바닥에
        글 : 박일선 (단청산수화 작가)                              는 전돌을 깔았고 중앙 상부에는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원추형의 황색 지붕
                                                        을 달았으며 천장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일곱 개 발톱이 달린 칠조룡(七爪龍)
        서울시청 앞 광장 동남쪽으로 높은 빌딩에 둘러싸인 조선호텔 앞에는 조그마        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고 한다. 팔면 벽에 설치된 문과 창은 솟을민꽃살문을
        한 시민공원이 있다. 바로 이 자리가 환구단(圜丘壇)이 있었던 곳이다. 고종      달았고, 1층에 달린 문의 궁창을 보면 보통 궁궐 문의 궁창에는 좀처럼 단청
        (高宗)이 자주 독립국가임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해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바        문양을 넣지 않는데 여기에는 특이하게도 여의두문을 그려 넣었다. 또한 바깥
        꾸고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황제로 즉위하였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기둥에는 당초문과 연화문을 초각(峭刻)한 낙양을 붙이고 호화스럽게 단청을
        이 곳은 회현방(會賢坊) 소공동(小公洞)이라는 동네로서 1593년(선조 26년)    하여 궁궐 건물에 못지않은 화려함을 과시하려는 듯하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주둔한 이래 청나라의 사신들
        이 머물렀던 남별궁(南別宮)이 있던 곳이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을 하고 1년   황궁우의 단청은 1886년 청나라 말기 서태후에 의해 재건된 이화원(頤和園)
        이 조금 지난 후 1897년 2월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국호    의 장랑에 대대적으로 쓰인 소식채화(蘇式彩畵)의 영향을 받았는지 정확하게
        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바꾸고 1897년 10월 12일 이 곳에서 제사  알 수는 없지만 여러가지 꽃과 새를 회화적으로 그려 넣어서 아름다움과 품격
        를 드린 후 황제로 등극했다.                                을 높였다. 중국에서는 단청을 채화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소식채화를
                                                        편하게 소식단청이라고 부르는데 중국 남방의 소주(蘇洲) 지역을 중심으로 발
        환구단의 환(圜)이란 한자는 환과 원, 두가지로 읽기 때문인지 원구단 또는 환     달한 단청 양식으로 산수, 화훼(花卉, 꽃이 피는 식물을 그린 그림), 영모(翎毛,
        단, 원단이라고도 부른다. 화강암으로 만든 3층의 원형 제단으로 중앙 상부에      새와 짐승을 그린 그림), 고사 인물 등을 회화적으로 그려넣는 것을 특징으로
        는 금색으로 칠한 원추형의 지붕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 식민       한다. 소식단청의 영향은 사찰단청에도 미쳤다고 볼 수 있는데 대웅전과 같은
        통치 초기인 1913년에 조선경성철도호텔(지금의 조선호텔)이 들어서면서 환       중요한 건물의 화려한 금단청에는 계풍에 금문과 풍혈(風穴) 문양을 넣고 풍
        구단은 헐리고 지금은 황궁우(皇穹宇)와 석조 정문, 그리고 1902년(광무 6년)   혈 안에 용, 봉황, 산수, 화조, 사군자, 인물 등을 회화적으로 그려 넣기도 한다.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세운 석고(石鼓)만이 남아 있다.
                                                        황궁우의 단청을 살펴보면 1층의 창방과 평방에 쓰인 단청은 병머리초를 하
        황궁우는 환구단이 조성되고 2년 뒤인 1899년(광무 2년)에 건립되었으며 천     고 계풍에는 화려하게 꽃과 새를 소재로 한 화조도를 그려 넣은 소식단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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