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 - 전시가이드 2021년 05월호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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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우 소식단청                                   황궁우 낙양



            하여 8면이 각각 한 폭의 회화를 보는 느낌이다.                     군주제와 의회의 설립을 주장한 독립협회의 정치개혁운동을 탄압하고 만민
            2층의 창방과 평방에도 1층과 마찬가지로 병머리초를 하고 계풍에는 꽃과 새       공동회를 해산시키는 등 백성들이 원하는 제대로 된 개혁과는 거리가 멀었다.
            를 그려 넣은 소식단청을 하였다.                              그런 와중에 황제국으로서 면모를 갖춘다는 명분으로 최초의 근대식 헌법이
            3층의 창방과 평방에는 병머리초를 하고 계풍에는 능화무늬를 그려 넣어 건        라 할 수 있는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제정하였지만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물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화려함과 우아함이 돋보이게 하였다.             만들기 보다는 고종 자신에게 절대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하여 조선시대 왕보
            정문도 아치(arch)가 3개인 홍예문으로 세우면서 천장의 단청을 황룡과 청룡     다 더 막강한 전제 군주로서의 황제권을 강화하였다.
            의 쌍룡으로 그려 넣었다. 또한 문 앞에 놓인 석조 계단에도 궁궐의 월대를 장
            식하고 있는 답도처럼 쌍룡을 새긴 것을 보면 황궁우의 위계가 어느 정도인        이렇듯 환구단과 황궁우를 건립할 당시에 고종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부국강
            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병을 통한 자주 독립보다는 국왕의 위엄을 살리는 일을 위하여 호화스럽게 단
                                                            청을 한 건물을 짓는 일에 국력을 낭비하는 등 허울좋은 자주 독립만을 외치
            그러나 아관파천 후 환궁하며 황제로 등극했던 일련의 과정들을 짚어 보면 부       면서 닥쳐올 망국의 치욕을 설마 짐작이나 했었겠는가?
            정부패와 거듭된 실정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군주가
            뭔가에 쫓기듯 허둥지둥 서둘러 밀어 부쳤던 것은 어찌 되었던 간에 망국의        일제 식민지 시대에 모진 수모와 설움을 겪고서도 아직까지 묵묵히 홀로 서 있
            길을 재촉한 것은 아닌가하는 느낌이 든다.                         는 황궁우를 보노라면 마치 어느 호텔의 정원에 딸린 정자 건물로 전락한 모습
            광무개혁이라 하여 일부 새로운 변화는 시도되었지만 한계에 부딪혔고, 입헌        으로 비춰지는 것이 너무 씁쓸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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