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5 - 전시가이드 2025년 02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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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상) 광화문 봉황도 (우상) 광화문 기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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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령은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의 광화문, 건춘문, 영추문, 신무문이나 한양
            도성의 4대문이었던 숭례문, 흥인지문 등과 4소문인 광희문, 혜화문 등을 비
            롯해서 궁궐이나 성곽의 문에는 예외 없이 천장에 단청으로 그려져 있다. 대
            체로 오색구름 속을 나는 구도로 그려졌는데 오색구름은 공간의 허전함을 메
            우고 신비로움을 표현하는 기법이었을 것이다.

            사령 단청의 특징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곳은 경복궁이다. 먼저 광화문(光
            化門)은 경복궁의 정문에 해당하는 남문(南門)으로서 다른 문에 비해 규모가
            제일 크고, 3개의 대문이 나 있는데 가운데 문의 천장에는 음양오행(陰陽五行)
            에서 남쪽을 상징하는 주작을 대치(對置)하여 봉황, 오른쪽 문의 천장에는 기
            린, 왼쪽 문의 천장에는 거북이 그려져 있다.
            건춘문(建春門)은 동문(東門)으로서 건춘(建春)은 '봄이 시작된다'라는 뜻으
                                                                                                 신무문 거북도
            로 동쪽은 봄을 상징하여 문의 천장에 용을 그렸는데 청룡과 황룡 2마리가
            그려져 있다.
            영추문(迎秋門)은 서문(西門)으로서 서쪽을 상징하는 백호가 그려져 있으며,
            신무문(神武門)은 북문(北門)으로서 북쪽을 상징하는 현무(玄武)를 대치하여
            거북을 오색구름과 함께 단청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식화가 고착되어 답습되면서 이어져 왔다. 이것이 지금의 민화로 이어지게 된
            이러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화공들은 단청 일이 없을 때면 민가에서 사령       것이고, 단청에서 파생된 듯한 이러한 그림들을 많은 사람들이 민화라고 알고
            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들      있으며, 민화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1959년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
            어서 이러한 그림들이 널리 유행하면서 이를 속화(俗畵)라 불렀으며, 민간의       ∼1961)가 민예(民藝)라는 잡지에 '불가사의한 조선 민화'와 '조선의 민화'라
            병풍이나 족자 또는 벽에 붙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아마도 화공을 포함한       는 두 편의 글이 발표되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민화라는 용어는 거의 쓰
            무명 화가나 떠돌이 화가들에 의해서 그려졌으며, 이런 그림들은 당시 민간        이질 않았으나 1960년대 이후로 민화라는 용어가 국내외로 널리 퍼지기 시
            의 생활양식이나 관습에 따라 그려졌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창의성보다는 형         작하여 정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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