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54 - 종사총람 수정증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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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 묘소에 성묘할 적에 항상 호랑이가 묘 옆에서 같이 지
켜주었으며 낮에도 항상 집까지 따라오니 이웃 사람들이 붙잡고
자 하자 성성(聖聲)이 말하기를“짐승도 감동하여 따라다니는데
어찌하여 잔인하게 해치겠느냐, 나는 응할 수 없다.”라고 말하
였다. 광무 6년(1902)에 효자의 정려를 내리었다.
Ÿ 김응위(金應渭) : 훈도(訓導) 성준(聲寯)의 후손으로 송정리(松亭里)에서 살았다.
심동근(沈東瑾)부사가 글을 지어 찬양하기를“서진(西晋) 시대
효자 왕상(王祥)이 얼음 위에 누워 얼음을 녹인 다음 잉어 두
마리를 구하여 제모에게 효행한 것과 또 오(吳)나라의 효자
맹종(孟宗)이 눈 속에서 죽순을 구하여 어머님을 공양한 효행
과도 짝지을 수 있다.”고 했다.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
였으며 고종(高宗) 19년(1882)에 효자 정려가 내리고 성암(惺
菴) 박도향(朴道향)이 글을 지었다.
Ÿ 김원태(金源台) : 회은(淮隱) 낙호(洛鎬)의 아들로 동회리(桐淮里)에서 살았다. 아
버님이 악성종기로 고생하시니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어 고쳤다.
상을 당하여는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집예의(集禮儀) 6권을 편찬
하였다. 장사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나이 44세로 돌아가시니
사림회(士林會) 장(葬)으로 장사지내고 표창을 상신하였다.
Ÿ 김요령(金堯齡) : 시중(侍中) 인궤(仁軌)의 후손으로 교가리(交柯里)에서 살았다.
아버지 병환으로 3년 동안 온갖 힘을 다하여 약을 지어 드리
고 간호하였으나 낫지 않고 임종에 다다르게 되니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 드려 3일을 더 연명하였으나 돌아가시니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효자 정려를 받았으며 정조(正祖)때 수직
(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벼슬을 받았다.
Ÿ 김귀하(金龜河) : 백대(栢臺) 진관(鎭官)의 아들로 동산리(東山里)에서 살았으며
벼슬은 감찰(監察)이다. 어머님이 악성 종기로 고생하시니 입
으로 고름을 빨아내어 병을 고쳤다. 아버님의 병환에 온갖 정
성을 다하여 하늘에 빌고 간호하다가 돌아가시니 3년간 소식
을 하며 초하루와 보름에는 비바람을 가리지 않고 성묘하였
다. 효자 표창을 받았다.
Ÿ 김형귀(金炯貴) : 소도리(所道里)에서 살았다. 어머님이 병환으로 누워 앓으시니
왼쪽 손가락을 잘라 입에 넣어 드렸으나 효과가 없어 다시 다
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 드리니 차갑던 가슴이 따뜻해지
며 회생하였다. 참판(參判) 권익상(權益相)이 비문을 지었다.
554 三陟金氏 宗史 總覽 修訂增補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