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20 - 종사총람 수정증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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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성(杆城)에서 이곳으로 유배지를 옮긴 후 궁궐을 짓고 구릿재(銅峴)에 동문
(銅門)을 세워 굳게 닫고 살햇재에 살문(箭門)을 세웠다고 한다. 이조실록에는
‘태조 3년(1394) 3월 14일에 공양군(恭讓君) 3부자를 간성(杆城)에서 삼척(三
陟)으로 이동시켰고 동년(同年) 4월 15일에 중추원부사(中樞院 副使) 정남진(鄭
南晋)과 형조의랑(刑曹議郞) 함부림(咸傅霖)을 삼척으로 파견하였는데 삼척에 도
착한 것은 4월 17일이었다. 도착하자 공양군에게 왕명을 말하기를 군(君-공양
왕을 뜻함)과 군의 여러 친척을 각처에 보내어 편안하게 생업을 누리게 하였던
바 이번 동래현령(東萊顯令) 김가행(金可行)과 염장관(鹽場官) 박충질(朴沖質)등
이 군(공양왕)과 군의 친척의 명령을 받아 국가에 대한 음모를 계획하여 그 성
패(成敗)를 장님 점장이 이흥무(李興茂)에게 물었던 사실이 드러났으니 이는 용
서 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공양군 3부자를 목매어 죽인다’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마을 사람들이 시체를 메고 매장하러 가는데 얼마를
가다가 상여꾼들의 발이 떨어지지 않아 그 자리에 매장한 곳이 지금의 고돌
재의 왕릉이다.
삼척부사가 이곳을 행차하는 도중 주막집에서 유숙하게 되었는데 꿈속에
점잖은 분이 나타나더니“그대는 복이 많아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으나 나는
송도(松都)의 왕자 왕석(王奭)으로 국가가 망하고 망명하여 이곳에서 죽음을
당하였으나 마을 사람들이 매장한 무덤이 헐어서 비바람을 못 가리우니 한심
스럽기 그지없소. 그대가 좀 봉축하여 주면 고맙겠소.”하면서 사라졌다. 부
사는 다음 날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능을 다시 봉축하였다는 이야기가 전
해지고 있다. 척주지(陟州誌)에“헌종 3년 가을에 부사 이규헌(李奎憲)이 공
양왕릉을 개축하였다.”하였으니 이 곳 부사로 왔던 이규헌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지금도 이 마을 사람들은 공양왕릉 앞에 집을 짓게 되면 그날 밤에는 반드
시 무너지고 만다는 속신으로 집을 전혀 짓지 못하고 있다. 또 음력 8월 초
하루에 이 능에 벌초를 먼저 하게 되면 어부들은 큰 횡재가 있다 하여 8월
초하루 자정이면 누가 먼저 벌초를 하는지 모른다고 한다. 또 왕릉 곁에 암
장을 하게 되면 그 시체는 어디론가 없어지고 만다는 전설도 전한다.
1662년 부사 허목(許穆)이 지은 척주지에“논밭 사이 궁궐터라고 하는 것에
초석과 기와 조각이 남아있어 부로(父老)들이 전하기를 고려 멸망 시 공양왕은
왕위를 사양하고 처음에는 원주로 후에 간성으로 왔다가 태조 3년(1394)에 삼
척에서 죽었다 한다. 그 당시 왕이 살고 있던 곳은 마을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고 왕의 장지도 이곳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지금 그곳에 산
직(産直)이 1명 있는데 다른 일은 없고 관에서 시키는 대소 판재(板材)를 제공
하는 일 밖에 하는 일이 없는데 이는 예부터 이렇게 하여 왔다. 왕 묘에 산직
620 三陟金氏 宗史 總覽 修訂增補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