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2 - 삼척김씨대종회보2005창간호_N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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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정(金九뷰)
                   삼척시 근덕면 교가리에 살았으며 모친이 병환으로 누웠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드려 병을 고쳤으며 선조왕이 승하하자 3년 동안 상복을 입었고 모친이 돌아
                 가셨을 때는 묘앞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그 때 호랑이가 지켜주었다고 하며 너무
                 슬피 애통하다 몸이 쇠약하여 죽었다. 숙종 7년(1681)에 정여문이 내렸으며 통정대부
                 로 추존되었다. 부사 박행의(朴行義)가 글을 지었으며 영조 14년(1738)가을에 정효비
                 (庭孝碑)를 고쳐 세운뒤 만재(晩齋)홍낙섭(洪%)이 ‘충효문(忠孝門)’의 세 글자를 써 붙였
                 으나 홍수로 비각이 유실되었으며 1959년 대기근으로 고생할 때 당시 면장 김진우(金
                 眞禹)가 천주교 원조 옥수수를 받아 죽을 끓여 가면서 땅을 파 비(碑)를 찾아내어 정여
                 각안에 세웠다.


               □  김옥권(金玉權)
                   현 동해시 구미리에서 살았으며 사람의 근본은 하늘이라 믿고 신을 감동시키도록 3
                 년동안 하늘에 기도하였더니 겨울철 백설 속에서 푸른 뱀을 얻어 마침내 4년간 고생하
                 던 아버지의 병을 고쳐 90세까지 장수하였다. 헌종 10년(1844)에 포상이 내렸으며 동
                 몽교관 (WS官)의 벼슬을 받았다.


               □  김흥일(金興一)
                   호는 오정(W),감찰 계광(啓光)의 손자로 효가리(동해시)에서 살았다.성품이 강직하여
                굴하지 않았으며 뛰어나게 총명하였다. 홍헌기(=)에게서 학문을 익혔으며 어버이를 섬

                 김에 틀림없고 웃 사람의 명령을 잘 따랐다. 부친의 병환에 3년간 약을 由? 간호하는데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으며 장사 때 묘자리를 잡는데 한 노인이 지팡이로 묘지의 위치를 잡
                아 주어 그 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김학조(=神)와 더불어 삼척김씨 시조의 재사인 보본

                단(報本W을 지었으며 족보를 간행했다. 후에 호조참판을 증직받았다.

              □  김석조(金銀神)
                  삼척시 근덕면 교가리 좌태곡에 살았으며 효도가 지극하여 어머니 병환에 단을 모아
                경건한 기도를 올렸더니 날짐승의 이변이 일어나서 병을 고쳤다 한다. 고종 14년
                (1877)에 효자의 정려를 내리고 승지의 벼슬을 받았으며 호조판서 정범조(®W)가 글
                을 지었다.


              Q 김응규(金應至)
                  동추(同® 종겸(宗B)의 아들로 삼척시 성내리에서 살았으며 호장(戶長)이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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