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0 -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_ 101가지 성경 이야기 1 & 2
P. 110
하나님을 믿지 않고 돌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부모님’이란 가치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고 생각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을 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지옥에 보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면서까지는
사랑하지 않아야 합니다만, 그것이 도를 넘을 경우, 즉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사랑할
경우 그 사랑은 하나님과 맞서 싸우게 되는 결과물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한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모든 사람들을 너무
사랑한다면 이 사람이 하나님께 갖게 될 의문은 당연합니다. ‘왜 하나님은 사람을
지옥에 보내시는 분입니까!’ 그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왜 사람을
지옥에 보내실 수밖에 없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사람을 사랑한다는
대원칙’만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무조건 사람에게 좋은 것’을 요구한다면, 결국
인간을 지옥에 보내시는 하나님은 불의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는 전혀
기독교의 진리도, 성경의 가르침도 아닙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르네상스’를 택하지
않고 ‘종교개혁’을 택했던 것입니다(타락한 중세에 대해 무신론자들이 선택한 방법론은
‘르네상스’ 즉, 사람을 중심한 인문주의였고, 신자들이 선택한 방법은 오히려 하나님 중심을
더 강조한 ‘종교개혁 ’이었습니다. ‘프랜시스 쉐퍼 ’는 중세가 끝나게 되는 시점에서의 두
움직임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1)
오늘날 말씀을 중심한 성경적 기독교가 뿌리내리기보다, 감정과 자신의 생각을
기준하고, 더욱이 사람을 위한 전도 지상주의(하나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의
전도가 아니라,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사람이 죽어 좋은 곳-천국-에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전도하는 것)의 생각들만이 팽배한 비정상적인 기독교가 뿌리내리면서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일들을 훨씬 더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공공연히 ‘부모님도 구원시키지
1) 프랜시스 쉐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김기찬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6). 여기에서 쉐퍼는 책의 앞부분을 이 사실을 논증하는 데 사용한다.
간단한 요약만을 인용해 보자. “우리는 이 두 가지 일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첫째로 남부에서는 절정기의 르네상스가 인간은 만물의
중심이고 자율적이라는 인본주의적 이상에 대부분 기초를 두고 있었고, 둘째로 북부
유럽에서는 종교개혁이 그 반대의 해답을 주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종교개혁은
절정기의 르네상스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을 때에 루터와 더불어 막 폭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p. 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