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7 -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_ 101가지 성경 이야기 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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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성경이 이 부분을 술 취한 노아가 주정을 부린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면,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계시가 이 순간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 만약 노아가 단지
술에 취해 추태를 보인 것이라면, 이 사건 뒤에 나오는 노아의 “저주와
축복”(함에게는 저주, 셈에게는 축복)은 단지 술 취한 후에 행한 기분 나쁜 언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이 구절의 의미는 대단히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사적 언사가 아닙니다. 성경은 야곱이
죽기 전에 자신의 열두 아들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로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거룩하게 선언한(계시한) 것과 같이, 노아가 이 점에서 자녀들의 향방을 예언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술 취한 노아”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2. 노아의 저주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본문을 단지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도덕적 행위로만 본다면, 노아의
행동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세상에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잠깐
실수한 것 때문에 저런 어마어마한 저주를 합니까? 게다가 잘못은 도리어 자기에게
있었습니다. 이것이 단지 도덕적 문제였다면, 함이 설령 아들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노아는 자기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하지만 노아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노아는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사건 때문에
아들을 저주합니다. 이 저주가 얼마나 참혹한 저주입니까?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아들이 술 취하여 뻗은 아버지의
하체를 잠깐 보았다고 해서 이런 혹독한 저주를 퍼붓다니요! 전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창세기 9장의 사건을 “노아가 술에 취해 보인 추태”라고
이해한다면, 노아는 “자신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훔쳐본 아들에게 어마어마한
저주를 퍼부은 괴상망측한 늙은이”가 되고 맙니다. 왜 이런 점을 성경 해석할 때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전혀 일반적인 도덕적 상황이
아닙니다. 분명 무언가 중요한 것을 계시하는 내용들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통의 경우 많은 설교자들이나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들이 “노아는
술에 취해 본분을 망각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습니다!”라는 식의 적용이나
해석을 할 때에는, 여기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