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6 -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_ 101가지 성경 이야기 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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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입니다. 욥이 하나님께 받은
책망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욥을 의롭다 하시고, 친구들을 불의하다 하십니다. 욥은
하나님을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단지 왜 자기에게 그 고통을 쏘시는지 이유를
몰라 답답해했을 뿐입니다. 왜 나의 하나님이 자신을 향해 화살을 쏘고 계시는지
궁금해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친구들은 하나님을 곡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하나님’이라는 굴레 안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친구들의 논지에 진노하십니다.
이런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우리는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했던 말을 가지고
아무런 생각 없이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말
자체가 틀린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선현들의 지혜일 수 있습니다. 좋은 말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게 되겠다’는 것과 유사한 사상이 성경에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함부로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실제로 성경에 보면, 고린도전서 3장 19절에서 바울이 욥기의 한 부분을
인용하는데, 그것이 엘리바스가 한 말입니다(고전 3: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욥 5:13 “지혜로운 자가 자기의 계략에 빠지게 하시며 간교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므로”). 성경 자체에 이런 부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욥기의 내용 전체
중에서 친구들이 한 말을 전혀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만약
그렇다면, 왜 성경이 그렇게 긴 논증을 다 기록해 두었겠습니까? 분명히 욥기의
내용을 전혀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말한 내용들 중에서는 성경 말씀의 교훈과 일치되는 것도 있을 수 있고, 신자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좋은 통찰을 주는 말씀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에서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지금의 한국 교회가 사용하는
방식으로 사용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전체 내용과 상관없이 그저
한 구절만 딱 뽑아서 사용하는 것 그리고 문맥 안에서, 본문 전체에서는 무엇을
말하는지는 관심도 없고, 사실 뭘 말하든 별로 개의치도 않는 것 그리고 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의 본문에서처럼 전후 내용을 살펴볼 때 이것을 사용해야
할까, 말까에 대해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는 것, 곧 성경의 본의와는 상관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