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87 -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_ 101가지 성경 이야기 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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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성령에 관하여 2(요 16:13~14)
성령 축제 같은 것이 가능한가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요 16:13~14).
전통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에서 성령님은 “부끄러워하시는 하나님”으로
1)
불리웠습니다.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신학자들이 이렇게 이름을 붙인 이유는,
성경이 가르치는 성령 하나님은 항상 스스로 주동해서 나서는 분이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만을 앞세우시고 자신은 나타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은 본질적으로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이 맞춰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성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성령에
대한 연구나 관심이 부족하였다가 더 활발한 연구와 관심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고무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삼위 하나님이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기울여야 하고, 이것이 학문적인 부분이 되었든, 성도 생활의 부분이 되었든 더 큰
열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와 증폭된 이 성령에 대한 관심이란
것이 대부분,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방법으로 기울여진 것이라기보다는 건전치 못한
성령 운동들의 발흥으로 인하여 생기게 된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최근에 많은
사람이 성령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소외되어 있었던 삼위 하나님의 한 일면에
대한 “참다운 관심”이 생겨나면서 일어난 결과물이 아니라, 신비주의적 은사주의
운동이나 영적 흐름들이 교회의 이곳저곳을 장악하면서 생기게 된 관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최근 성령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달가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성도들도 자연히 ‘성령’에 대해 듣게 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최근에는 은사주의 운동이나 성령 운동을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보수주의
교단들에서도 심심치 않게 ‘성령 축제’ 따위의 용어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이런 종류의 성령 운동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해도 되는 것일까요?
성령에 대한 강조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 종교개혁 전통의
1) 박영돈, “거룩한 수줍음(Holy Shyness)”,『선지동산』, no. 51(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