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3 - 구원이란 무엇인가-김세윤
P. 43
니까!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와 풍요를 가져다 주어 우리의 삶을 확대하는 과학과 기술이 동
시에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까? 이러한 사례는 너무도 많습니다(공해, 첨단 무
기 그리고 그들에 대한 공포).
이 세상 안에서 우리에게 있는 것 또는 우리 인간이 도모할 수 있는 것은, 항상 삶과 죽음의
변증법적인 실재이지 죽음의 이면이 없는 순수한 삶만 주는 실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세
상에서는 삶이 확대되는 곳에 그것이 확대되는 만큼 죽음도 확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바라는 메시아의 왕국이 이 내재의 실재인 한 그것의 최상도 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고난을 해결하는 구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자로서, 마치 생명의 대지로부터 뿌리뽑힌 나무와 같습니다. 삶의 근원인 대지로부터
뿌리뽑힌 나무에게 아무리 물을 붓고 주사를 놓고 해도 그것이 죽어 가는 것을 근본적으로는
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가 요한복음 6장에서 그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해가 왜 진정한 구원인가
예수가 약속하는 구원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룰 구원은 무엇입니까? 신약 성
경은 그것을 우리를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한다거
나, 우리를 다시 한 번 의인 되게 하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한다는 등의 그림들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표현하는 실재는 무엇일까요? 뿌리뽑힌 나무가 생명의 근원인 대지에 다시 뿌
리를 내려 그곳으로부터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아 다시 살듯이, 우리가 삶의 근원인 창조주 하
나님께 연합되어 창조주의 생명력을 공급받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가 약속하고
이룬 구원입니다. 이것을 가져다 주는 분이 진짜 메시아 곧 종말의 구원자입니다. 이 세상의
내재 속에서 상대적으로 좀더 많은 자유, 상대적으로 좀더 많은 풍요, 상대적으로 좀더 많은
정의를 가져오는 자는 궁극적인 의미의 구원자일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의 대화를 예로 들어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봅
시다. 사마리아 여인은 야곱의 우물을 가리키면서, 그의 조상이 준 그 우물로 인해 그의 후손
들인 자신들이 생명을 얻었다고 자랑합니다. 여기에서 우물은 사막의 오아시스를 말합니다.
오아시스는 한 부족의 삶을 지탱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그 오아시스에서 물론 마실 물도 얻지
만, 가축이 살게 되고 농사가 가능하게 됩니다. 야곱이 준 그 오아시스는 야곱의 후손들에게
생명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풍성함을 허락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물을 마시면 다시 목마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에
서 광야의 만나를 먹은 자들이 다 죽었다고 한 말과 똑같은 뜻입니다. 그 물을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만 자기가 주는 물은 생수요 진정한 생명 곧 영생이 샘솟게 하는 물이라고 말합니다.
이로써 예수는 그가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고 그의 영 곧 성령(생명을 주는 영)을 받아 영
생을 얻게 할 것임을 말합니다. 야곱의 우물은 종말의 메시아가 가져다 줄 생수의 그림자요
모조품이었던 것입니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는 종말에 메시아가 가져올 하늘의 진정한 양식의
그림자요 모조품이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종말에 이 내재의 세
상 속에서 맛볼 수 있는 상대적으로 좀더 많은 자유와 좀더 많은 풍요와 좀더 많은 정의 등을
가져오리라는 표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의 절대적 자유와 절대적 풍요와 절대적 정의를
가져오리라는 표적이었습니다.
나단의 신탁에 의거하여 다윗 왕조를 재건하리라고 본 유대인들의 메시아 사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 그 하나님의 통치를 인간적으로 이 세상의 내재 속에서 대행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