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1 - 구원이란 무엇인가-김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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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옵니다.  첫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면서,  종말에  있으리라고  기대된  제2의  출애굽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그  계절  곧  유월절에  예수께서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것입니다.
                  그것을  체험한  군중들은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예수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서  모세와  같은  구원을  가져올  분임을  나타내는  표적이  아닌가!  모세가  출애굽  때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기적적으로  만나를  먹였듯이,  예수가  그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고  그와  똑같은
                  제2의  출애굽의  구원이  있기를  갈망하는  유월절  기간에  기적적으로  만나를  먹인  것이다.’  그
                  래서  그  오천  명의  군중들은  ‘야!  신명기  18장  15절에  약속한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나타났
                  다!  진짜  메시아가  왔구나!  이  예수가  진짜  제2의  출애굽의  구원을  이루겠구나!  로마  압박자들
                  을  몰아내고  제2의  출애굽의  구원,  자유와  풍요와  정의의  샬롬을  이룰  구원자가  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추대하고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옳거니!’  하고  거기에  부응하셨습니까?  그렇지  않
                  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도망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밤새  예수님을  뒤쫓아  다녔습니다.  바로
                  이  사건에서  그들의  메시아적  갈망,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정의를  가져오는  메
                  시아에  대한  그들의  갈망이  절실히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먹은  그  만나가  구원이  아니었다.  그것을  먹어도  너희들의  선조들은  다  죽었지  않
                  느냐?  너희들은  지금  나에게  모세가  가져다  준  정치적  자유,  경제적  풍요,  사회적  정의  등을
                  이루어  주는  메시아가  되라고  하는데  그것이  진정한  구원이  아니다.  너희가  그것들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은  다시  배고프게  되고  죽는다.  그것들이  조금은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구원은  되지  못한다.  내가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인  사건은  문자  그대로  물리적인  시간과  공
                  간에서  모세가  행한  제2의  출애굽을  이루겠다는  표적이  아니라,  하늘의  양식을  가져다  줄  것
                  에  대한  표적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구조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친다든지,  오천  명을  먹인다든지,  장님의
                  눈을  뜨게  한다든지,  물리적인  이적을  행하여  그가  가져오는  영생에  대한  표적이  되게  합니
                  다.  그런데  유대인들은(이  세상  사람들의  대표로서)  항상  물리적인  혹은  이  세상적인  또는  육
                  신적인  관점에서만  생각합니다.  육신적인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그들은  예수의  행위의  영적인
                  의미,  진정한  의미는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표적을  이  세상에서,  물질적인  의
                  미로만  해석하여  그들의  진정한  의미를  오해합니다.  이  오해에  대항하여  예수는  긴  설교를  통
                  하여  그  이적이  진정으로  표적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이  요한복음  6장에  의하면  예수는  광야에서  오천  명에게  떡  또는  밥을  먹였는데,  그것은  무엇
                  을  표징하는  것입니까?  밥은  생명을  주는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적은  예수가  생명을  주
                  는  자임을  표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떻게  해석합니까?  그들은  예수가  이  세상
                  적인  자유와  풍요와  정의,  즉  이  세상  내에서의  풍성한  삶을  가져다  주는  자임을  표적하는  것
                  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것들은  이  세상의  내재적인  것들이기에  구원  곧  진정한
                  삶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내재적인  것들은  한계가  있어서,  결국에는  결핍과  죽
                  음을  띨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므리바의  물을  마신  자들  곧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의  ‘구원’을  받은  자들도  다  죽었습니다.
                  예수는  말합니다.  “너희들이  바라는  그런  것은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구원이  아니다.  그런  것
                  을  가져다  주는  자가  메시아가  아니다.  메시아는  절대적인  의미의  구원을  가져다  주는  분,  이
                  세상을  초월하는  하늘  나라의  영생을  가져다  주는  분이다.”  그리고  자기가  바로  그것을  가져
                  다  준다고  가르칩니다.  어떻게  가져다  줍니까?  예수의  설명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내가  바로
                  영생을  주는  떡이다.  내가  바로  하늘에서  온  그  떡이다.”  그것을  좀더  부연하여  예수는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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