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2 - 구원이란 무엇인가-김세윤
P. 42
극적(劇的)으로 선언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
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나의 살과 피가 바로
영생을 주는 하늘로부터 온 떡”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의 이 말씀은 최후 만찬에서의 말씀
에 대한 요한복음식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다음날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의 의미를 떡을 떼어 나
누어주고 빨간 포도주를 부어 주는 몸짓과 그에 덧붙인 해설로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죽음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대속의 제사요,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대속의 제
사는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대속의 제사는 우리의 죄가 용서되어 우리를 하나
님 앞에서 의롭게 되게 하고, 새 언약의 제사는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
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 나라 선포로 약속한바, 우리로 하여금 하
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해주겠다, 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
하나님 ‘아빠’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게 해주겠다는 것을 자신의 죽음을 통해 성취하는 것
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53절 말씀은 바로 그 말씀의 다른 표현입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이 세상적인
풍성한 삶을 넘어서一이 세상의 풍성한 삶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적인 것으
로 절대적 구원이 되지 못한다一이것(즉 광야에서 내가 기적적으로 너희에게 준 떡)이 상징하
는 절대적인 구원 곧 영생을 가져다 주는 자이다. 나의 살이 부서지도록 내어 주고 나의 피를
쏟음으로 대속을 이루고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를 드림으로써 너희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
또는 자녀가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희의 죄가 초래한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곧 죽
음)를 극복하고, 너희로 하여금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다시 연합되게 하여 그의 생명 곧 신
적 생명(성경적 숙어로 말하면 ‘영생’)을 얻도록 하겠다.”
진정한 구원은 내재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라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가 약속한 이 구원과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구원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진정한
구원입니까? 이 세상 안에, 피조 세계의 한계 내에 절대적인 자유가 있을 수 있습니까? 절대
적 풍요가 있을 수 있습니까? 절대적 정의가 있을 수 있습니까? 물론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
적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최상의 자유, 최상의 정의, 최상의 풍요가 있는 곳을 상상해
볼 수는 있습니다.
미국 시민만큼 많은 자유를 누리는 시민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동시에 권총과 마약
과 연결된 범죄들로 인하여 미국 시민만큼 공포와 속박을 많이 느끼는 시민이 또 어디 있습니
까? 미국의 그 많은 자유가 그 많은 총기와 마약의 범죄를 낳아 그 많은 속박을 초래하지 않
습니까? 이것을 역설이라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변증법이라고 해야 합니까? 미국보다 더 풍
요로운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인류 문명의 최고를 상징하는 그 어마어마하고
화려한 미국 뉴욕의 맨해튼의 마천루 밑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어슬렁거리는 무주택자들의 비참
함과 빈곤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점증하는 것으로 보이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다른 한편 심각해져 가는 인간성의 황폐를 생각
해 보십시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분명히 우리의 삶을 증진시킨 측면이 있습니다. 생산 수
단의 발달은 분명 우리에게 많은 풍요를 가져와서 우리를 결핍의 고난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우
리의 삶을 확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공해를 유발시키고 물질주의, 소비주의, 쾌락주의
속에서 인간성을 황폐화하여 죽음을 확대하기도 했습니다. 교통과 통신 수단의 발달은 우리에
게 더 많은 시간적 공간적 자유를 가져다 주어 우리의 삶을 확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
시에 바로 그것들 때문에(전화! 도청 장치!) 우리의 프라이버시와 자유는 얼마나 구속을 당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