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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6·25전쟁기(1950~1953)의 오산교육 265
문화
1950년 6월 25일 민족 간에 시작된 전쟁은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대부분 학교는 문을 닫았고,
학생과 교사는 뿔뿔이 흩어졌으며 학교 건물은 파괴되었다. 행정력은 마비된 채 피난지를 돌아다니 · 예술
며 천막이나 야외에서 수업을 하며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 동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 작전 · 체육
으로 28일 서울을 수복한 후 상황은 더욱 심각하였다. 학교시설은 거의 파괴되었고 잔존 건물에는 대 / 교육
부분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거나 야전병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일부 학생 중에는 군에 입대하여 전
쟁터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학생도 있었다. 6·25전쟁으로 인해 대다수 학교는 파괴되었다. / 종교
동년 6월 29일 서울이 함락되고, 7월 4일에는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워 수원 쪽으로부터 남침하여,
오산 죽미령에 진을 치고 있던 미국 기동타격대와 교전하게 되었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급히 참전하
게 된 미군은 한국 지리에 어두웠고, 장비 면이나 수적으로 열세인 미군은 오산을 사수하려 하였으
나, 수십 대의 소련제 탱크와 2천5백여 명에 달하는 적군에 밀려 6시간 교전 끝에 4백 67명 중 1백 81
명의 사상자를 내고 오산은 함락되었다. 그러나 동년 9월 27일에 유엔군이 오산을 재탈환하게 되었
고, 전쟁 피해를 복구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이 당시 오산이 속한 화성군에만 17개교가 파손되었으며 피해액은 1억 4천4백9천 환이었다(1951년
9월 1일 기준). 전투로 인해 학교교육은 중단되었다. 학교 건물은 파괴되고 남은 건물은 미군이 사용
하고 있어 수복 후에도 다시 모인 학생들은 교실 없는 운동장에서 나무 밑에 가마니를 깔고 공부하였
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교육에 대한 높은 열망으로 오산중학교가 개교하였다.
1) 국민학교
성호초등학교는 6·25전쟁 전에 전교생은 1천3백22명이었으나, 전쟁 발발로 피난했던 학생이 되
돌아와 수업할 때는 5백99명으로 줄어들었다. 이후, 1951년 1월 4일, 1·4후퇴로 인해 대부분의 아동
들이 피난을 가거나 집에서 학교에 나오지 않는 관계로 휴교령이 내려졌다. 동년 5월 22일에 다시 개
교하였으나 총 학생 수는 불과 82명으로 잔존한 교실은 4개뿐이었다. 폐허가 된 시가지와 더불어 시
골의 많은 초가들도 폭격에 불탔다. 이러한 격랑 속에서도 오산의 초등교육은 끊임없는 학교의 노력
으로 1952년에는 CAC 원조로 5교실이 완성되어 3부제를 실시하였으며, 1백4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
였다. 성호초등학교, 오산초등학교 등에서 교사 이전과 같은 위기 속에서도 학생 교육을 지속하기 위
해 노력하였다.
2) 중학교
1950년 6월 29일 서울함락과 함께 휴교에 들어간 오산중학교는 7월 10일에는 오산중학교의 서부
교사가 파괴되었다. 9월 27일에 유엔군이 오산을 재탈환하게 되어 10월 11일 오산중학교는 다시 개
교하게 되었다. 교직원은 교장 서영석, 교사 이기춘, 장세복, 최찬균 등이 정상적으로 학교운영을 하
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다시 서울을 내주고 후퇴(1·4후퇴)하였고 소개령(疏開
令)이 내려짐에 따라 많은 국민들이 남쪽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오산중학교도 12월 12일부터 임시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