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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원은 수많은 탄압과 감시를 견뎌내고,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1930년에 첫 졸업생 40명을 배 261
출한 이후,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총 18회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광복 이후인 1946년 6월 문화
30일에 삼미공립국민학교 세교분교장이 되었으며, 1949년에 공립인 광성초등학교로 변경되었다. · 예술
(4) 서당 · 체육
1900년 이전에, 오산리의 유지들에 의한 조합식 서당이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1913년 말 오산지역 / 교육
을 포함한 수원군의 학생 수는 365명이었다. 이 중 한국인 서당은 150개였으며, 1,144명의 학생들이 / 종교
교육을 통해, 민족의 얼을 수학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산공립보통학교 일본인 교장이 부임함에 따라,
오산서당 생도 47명에게 일요국어(日曜國語 : 일어) 강습회를 통해, 일어교육을 반강제적으로 실시
하였다. 연례적인 학사운영의 일환으로 매년마다 매주 일요일에 서당생도들을 소집하여 철저하게 일
어교육을 실시하였다. 1928년 이후 일제의 서당 규칙령에 의한 탄압이 심해지고, 오산공립보통학교
에 취학하는 학생들이 늘어감에 따라 오산서당은 1930년 후반에 폐쇄되었다. 정남면의 참봉서당도
유생 김홍식에 의해 개설하였다가 보통학교에 취학하는 학생이 늘어감에 따라 폐쇄되었다.
4. 민족말살통치기(1931~1945년)의 오산교육
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은 한때 문화정치(文化政治)라는 회유책으로 일시적으로 한글교육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일본이 열세에 몰리기 시작하자, 1936년에 부임한
미나미 총독은 3대 교육정책인 국체명징(國體明徵), 내선일체(內鮮一體), 인고단련(忍苦鍛鍊)을 통해
민족말살정책을 펼쳤다. 이 시기의 교육은 한국의 병참기지화를 위해, 철저한 전시체제 속에서 일본
의 전쟁완수를 위한 수단으로 민족말살교육정책을 펼쳤다.
1) 국민학교
제3차 교육령에 의한 「소학교규정」에 따라, 보통학교 이름이 국민학교로 개명되었다. 학과목은 38
개 과목으로 체조·교련·수신·국어(일본어) 위주로, 일본의 언어중심과 체련에 큰 중심을 두었다.
현역 배속 장교가 감시하는 분위기에서 수업이 진행되어, 점차 교육은 지도에서 훈련으로 변모되었
다. 또한, 각급 학교의 학생자치회를 해산시키고 국민총력연맹으로 소속하게 하였다. 오산의 경우도,
1940년 10월에 오산공립소학교 분회로 편입되어, 일본 패망직전까지 전시교육령을 공포하고, 학도
대를 조직하여 학생들을 전쟁터로 동원함에 따라 사실상 학교교육은 정지된 상태였다.
화성과 오산지역에는 중등교육 기관이 없었으나, 인근지역인 수원에 중등교육기관에 해당하는 학
교들이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수원지역의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삼일학교(삼일중학교, 삼일공고, 삼
일상고), 삼일여학교(매향여중, 매향여자정보고), 수원고등농림학교(서울농대), 수원공립고등여학교
(수원여고), 수원고등학교 농립학교 부설농업교육 양성소, 수원상업전수학교, 수원공립농업실수학교
등이 있었다. 이를 통해, 수원을 포함한 경기지역과 서울권의 중등교육 기관을 통해, 오산지역에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