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3 - 오산문화총서 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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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다. 즉 당제사라 명칭을 하지만 실제는 산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지역과 당제사라고 하면서
                       산신이 아니 지역의 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리느냐와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지곶동은 당제

                       사라고 하면서 흰시루를 올리고 있고 탑동은 당제사라 하면서 팥시루를 올리고 있다. 그러니 지
                       곶동은 당제사라 하여도 산신제를 지내고 있는 지역이며 탑동의 경우는 토지신을 주신격으로
                       모시고 있는 지역이 되는 것이다. 이는 원동에서도 세 개의 마을이 흰시루를 올리는 마을과 팥

                       시루를 올리는 마을로 구분되는 것과 같다. 원동의 세 개 마을이 당제사라고 하면서 또한 당신
                       화인 당이 생겨난 유래담을 비슷하게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마을의 특성에 따라 산신의 신격과
                       토지신의 신격을 다르게 인식하고 모시고 있는 경우로 판단된다. 이는 원동의 절골은 청송심씨

                       들의 세거지인데 이 곳에서 모시는 신격은 조상신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조상신
                       이 마을의 토지신으로 좌정된 예가 아닐까 한다.

                          떡을 올리는 데에 있어 가장 특색이 있는 지역은 부산동이다. 부산동은 지역에서 불리는 이
                       름이 가마뫼이다. 이는 부산(釜山)의 부(釜)가 ‘가마’로 ‘가맣다’, ‘검다’의 의미이며 검은산의 의
                       미로 부산으로 기록되었음을 보여주는 마을이다. 또한 이 곳은 경기지역 재인(才人)들이 학습하

                       면서 본거지를 이루고 살았던 경기도 가계세습무인 화랭이들이 모여 살았던 지역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러하기에 검은시루를 올린다고 판단한다. 검은시루는 조상시루이
                       다. 조상께 올리는 떡이 바로 검은콩으로 올리는 검은시루인 것이다. 이는 마을의 형성과정과의

                       관련성에서 생각하고 추정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여 화랭이집단의 거주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화랭이의 조상 가운데 입향조에 해당하는 이를 모시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여기에 의
                       미를 더하는 것은 가래떡을 올린다는 점이다. 가래떡을 용떡이라고 하면서 제의에 올리고 있는

                       데 용떡은 어업을 주로 하는 지역에서 용왕에게 올리는 제물이다. 그런데 마을의 어디에서 쉽게
                       물길의 존재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떤 연유와 까닭에서 용떡을 올리게 된 것일까? 좀

                       더 소상하게 세밀한 제보와 연구가 있어야겠으나 필자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부산동이 오산천과
                       맞닿아 물길을 접하고 있었을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보여지고 있는 모습으로가
                       아니라 그 옛날의 지형과 그 특성은 적어도 100년 전, 200년 전 아니면 그 보다 더 오래전 부산

                       동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형성되는 과정에 나타났던 역사의 진행과정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 때
                             3)
                       문이다.



                       3) 화성시의 당성에 올라 현재의 모습으로 천년 전의 모습을 동일하게 보아서는 안된다. 이는 적어도 신라와 당나라가 서로 교류
                         하였던 그 지점에서 당성의 모습을 보고 들판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지금은 들녁이지만 당시에는 바다였다. 그러니 원효와 관
                         련하여 평택과 화성이 서로 주장하는 바는 비단 우리의 문화적 역사적 인물을 원효를 대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원효는 전국 도
                         처에 그의 기행과 이적에 관련된 이야기가 전하며 그리하여 전국 도처가 원효에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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