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29 - 오산문화총서 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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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임금은 독성산성을 수리하고 나서 독산의 토지신(土地神)에게 올릴 제문(祭文)과 비문(碑
文)을 직접 지어 내렸다. 그리고 경기도 관찰사인 수원도호부의 부사에게 해마다 제향하게 하였
다.
정조임금은 무슨 까닭으로 수원고읍성을 아버지 사도세자의 유택으로 삼았는가? 또 무슨 까
닭으로 독산의 토지신에게 해마다 제향하는 일을 수원유수에게 교지하였는가? <정조실록>은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정조 14년 2월, 독성산성에 행차해서 장대에 임하고 운주당(運籌堂)에 이르러 산성의 부로(父老)를
불러 위로하였다. 상(上)이 경진년 온행(溫幸,온양온천행)중에 독성에 들러 운주당에 숙소를 삼고 진
남루에 하림(下臨)하여 활을 쏘니 연달아 네 화살이 맞았다.
정조 16년 7월, 독성산성을 수축(修築)하고 토신(土神)에게 고유(告由)토록 하였다. 고유제품(告由祭
品)과 제문(祭文)의 격식을 정하여 부사(府使)가 헌관(獻官)이 되고 중군(中軍) 및 부내(府內) 당상관
(堂上官)이 추천한 조신들이 다음 헌관이 되었다. 향(香)과 축문(祝文)인즉 향관(香官)이 경기감영(京
畿監營)에 전하고 경기감영 정문찰방(定文察訪)이 대축관(大祝官)을 겸(兼)해서 이 행사를 치렀다.
정조 16년 10월 교지(敎旨), 산성(山城)은 중(重)한 땅이요 원침(園寢)에 가깝고 또 경진년에 주숙(駐
宿)하던 처소이다. 장대(將臺)는 곧 진남루인데 전년(前年)에 등림(登臨)하던 곳으로 지금 수축한다
하니 마땅히 비문(碑文)을 지어 내릴 것이되 전임(前任) 규장각신(奎章閣臣)중에서 좌상(左上)이 지
어 올리라.
정조임금은 오산시의 진산 독산(禿山)을 향로봉(香爐峰)으로 불렀다. 그리고 수원고읍성의 진
산 곶산(串山)을 꽃산(花山)으로 바꾸어 불렀다. 독산을 향로봉으로 부른 것은 아버지 사도세자
의 영면을 위한 정조의 효심이었다. 곶산이 화산으로 바뀐 것은 강과 바다를 이용하던 고려시대
의 조운제도가 쇠퇴하였다는 의미이기도하다.
1910년, 일제 강점기에 독산성 세마대는 일본인들의 손에 파괴되었다. 그러나 광복 후인 1957
년 오산지역 주민들의 힘으로 세마대는 다시 섰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승만 대통령도 기뻐하
며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세마대 준공식 날 친필로 쓴 현판 ‘洗馬坮’를 보내왔다.
독산성 세마대는 국난극복의 현장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찾는 명소이다. 임진왜란의 승전을
기리고 국방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산 교육장이다.
오산교육의 백년지대계 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