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1 - 오산문화총서 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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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문화이념을 수용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과 연계시키면서 지방에 세운 것이다. 향교가 적
                       극적으로 설립된 것은 숭유억불과 유교문화이념을 정치이념으로 표방한 조선시대부터이다.

                         조선왕조는 유교문화이념을 수용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일상생활을 유교문
                       화 논리에 접목시키고 과거제 운영을 유교 교육과 연계시키려 했다. 이러한 사회문화의 기초기
                       구로서의 기능을 담당한 것이 향교이다. 따라서 국가는 군현제의 정비와 함께 지방 수령들에게

                       향교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보호 육성을 촉구했다. 이를 위한 국가의 재정적 지원도 적극적이었
                       다. 따라서 조선시대 향교는 지방 수령의 책임 하에 그 운영이 활성화되었다.
                         오산시 주변에는 수원시 교동의 교동향교, 화성시 남양동의 남양향교, 평택시 진위면의 진위

                       향교 등이 있었다. 오산지역의 유생들은 이들 향교에서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호구(戶口) 5백을 기준단위로 향교가 설립되었다. 교육과정은 소학(小學), 사

                       서오경(四書五經) 등을 가르쳤으며 학업 성취가 우수한 자에게 생원이나 진사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주었다. 향교에서 수학하는 인원은 대략 50명~70명이었으며 16세 이상의 성인이
                       대상이었다.

                         <경국대전>에 기록된 조선시대 향교의 수는 335개였으며 경기도에 설립된 향교의 수는 37개
                       교였다.



                       4) 초등교육기관 서당



                         조선 중기 이후에 확장된 사학의 초등교육기관은 서당(書堂)이었다. 오산지역에서는 여러 곳
                       의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운영되었다. 서당은 향교나 서원에 입학하기 위한 준비단계로 마을 어
                       른인 훈장(訓長)이 양반의 자제나 평민의 아동을 모아 가르쳤다. 학동의 수준에 따라 千字文 小

                       學 大學 論語 孟子 등을 가르쳤으며 習字도 익혔다.
                         마을 단위로 운영된 서당의 규모는 작았으나 지방 문화의 창달은 물론 국민 교육의 기초가 되
                       었다. 마을에 덕망 있고 학식 있는 생원이나 진사가 운영하였다.

                         1917년 경, 오산을 포함한 수원군에서 운영된 서당의 수효는 1백 개가 넘었다. 일제는 마을 단
                       위로 운영되는 서당의 존재가 눈에 거슬렸다. 이에 1918년에는 서당규칙이라는 정부령 18호를

                       공포하여 서당 교육을 통제하고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1929년, 또다시 서당 규칙령을 공포하여 도지사의 인가제로 전환하고 총독부 편찬의 일어(日
                       語)와 산술(算術) 교과서의 사용을 강요하였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오산지역 서당의 수효는 급

                       격히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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