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89 - 오산문화총서 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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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해바라기』(1939년), 『이효석단편 되고 장평에서 대화까지는 30리, 하장평, 재
선』(1941년), 『황제』(1943년) 등이 있고, 장편 산, 재재(고개이름)를 넘어 신리, 상대화리,
으로는 『화분』(1939년), 『벽공무한』(1941년)이 대화로 이어진다. 대화면의 대화거리는 곧
있다. 대화장터인데 이 거리도 이효석이 걸어 다녔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의 본마을 창동리 서 던 길목이 된다. 대화에서 평창까지는 40리,
남쪽에 있는 성황당을 지나 봉평마을 건너 다시 이 길을 거쳐 평창 하숙집에 오게 된다.
쭉 빠진 협곡의 마을, 이효석의 생가는 이 마 6년 동안 이효석은 이 100리 길을 왕래하였
을의 중간쯤 되는 우경산 밑에 있다. 이 집에 다. 이효석은 이 100리 길 속에서 자연을 배
서 이효석은 산촌의 자연을 뼈마디에 새기며 웠다. 봄에는 꽃피는 동산구비를, 여름에는
8세에 이르렀다. 1914년 8세 때 외학을 하게 들판에 깔린 오곡의 청파, 뜨거운 햇빛, 소나
되어 봉평에서 100리가 떨어진 군 소재지 평 기, 숲의 청산들을 바라보며 가을은 자지러
창공립보통학교(현 평창초등학교)에 입학을 지게 피어있는 메밀꽃밭을 지나면서 멀리 물
하였다. 평창에서는 하숙을 하였다. 이때의 들어가는 단풍산의 원경에 취하고 낙엽도 밟
교통수단은 우마차 아니면 도보였다. 그러므 게 되며 겨울은 산촌에 내리는 눈을 맞이하
로 효석은 봉평과 평창 사이 100리를 거의 걸 였고 산악 지대의 설경에 파묻혀 살았다. 절
어서 다녔다. 그래서 그 길은 자연 집에서 나 기마다 다른 분위기와 변화해가는 자연의 순
와 마을을 거쳐 봉평천(흥정천)에 다다르고 환을 맛보게 되었다. 또 절기마다 하늘과 구
여기에서는 좌편 강변에 있는 동네 물레방 름의 색깔이 다르게 변하였고, 바람결 또한
아를 만나게 되고, 그 다음은 봉평천 징검다 그렇게 변하며 불던 것을 직접 피부로 느끼
리를 건너 봉평의 성황당을 지나면서 봉평의 며 유년시절을 지내왔던 것이다. 훗날 그의
본 마을 창동리에 들어와 상가와 주점, 봉평 작품 속에 나오는 자연의 숨소리가 싱그러운
장터 걸리를 뚫고 시내를 빠져나오게 되는데 것은 이 유년시절에 체험하고 몸에 밴 소질
이중 충주집(훗날 「메밀꽃 필 무렵」의 작품 에서 풀어져 나온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속에 나오는 주점)이란 주점도 지나왔다. 봉 효석은 깔끔한 외모로 항상 온화한 말로 사
평 시내를 빠져나와서는 장평까지 20리, 노 람을 대했다고 하며 의지가 굳고 개성이 강
루목고개(「메밀꽃 필 무렵」 작품 속에 나오는 한 품성을 갖고 있었다. 다재다능했던 사람
고개)를 넘게 되면 장평의 개울「메밀꽃 필 무 으로 평가받는 이효석은 평창공립보통학교를
렵」작품 속에 나오는 개울)에 이르며 이 개울 1등으로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을 건너서는 장평 삼거리 (한길은 봉평으로 무시험으로 입학하였으며, 고교 재학 시 학
가는길, 한길은 강릉, 하길은 평창길)에 닿게 업성적이 우수하여 졸업식에서 우등상을 수
오산문화원 장수 프로그램 테마가 있는 인문학기행 들여다보기 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