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90 - 오산문화총서 3집
P. 290
상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재학 시절에는 영문 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안정된 생활을 하였
학 성적이 우수했다. 그 외에도 그는 문학적 는데, 이효석은 아내를 잃기 전인 1940년까
능력이 뛰어났으며, 음악적 능력도 탁월하였 지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 사회적으로 존
다. 스포츠에도 재능과 소질을 보였다. 경받는 생활, 작가로서 유명한 생활을 이어
이효석은 서구지향적 모더니스트로 그는 나가며 「모밀꽃 필 무렵」과 같이 뛰어난 작품
빵과 버터 등의 음식, 커피, 모차르트와 쇼팽 을 창작하였다. 이효석은 활발한 사회생활과
의 피아노곡 연주, 프랑스 영화감상을 즐겼 함께 주을 온천과 동해안 등 관북지방의 명
고 서양 화초가 가득한 붉은 벽돌집에서 생 승지를 자주 여행했다. 이효석의 행복한 생
활하며 유럽여행을 꿈꾸는 등 매우 서구적 활도 오래 가지 못해 1940년 34세 때 아내
취향을 갖고 있었다. 그는 빈궁한 생활을 하 를 잃고 이어 차남 영주를 잃었다. 그리고 그
면서도 복장을 잘 차려 입고 다녔다. 문학가 에게도 삶의 마지막이 찾아왔다. 1942년 5월
로서 이효석은 사람의 미묘한 심리 상태를 25일 아침 7시 30분, 36살의 짧은 삶을 마감
정확하고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능력이 뛰어 했다. 사인은 결핵성 뇌막염이었다.
났으며, 세상에 대한 관찰력과 해석력이 뛰
어나 자연 정경을 묘사하는 데 탁월한 능력
을 발휘하였다. 문학과 예술이 인생의 전부
였던 사람 이효석은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나날의 생활과 예술이라고 하
였고, 인간 중 시인이 가장 가치 있는 인간이
라 생각하였다.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다
시 현재의 나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할 정도
로 문학과 예술이 삶의 전부인 작가였다. 문
이효석문학관. 사진 차상현
학가 이효석은 주로 소설을 써서 발표했지만
습작기에는 시를 쓰기도 했으며 희곡과 시나
리오, 평론과 수필 등을 써서 발표하기도 했
다. 유명 작가로 알려지면서 그는 상당히 많
은 집필 의뢰를 받았다. 이효석은 1936년 숭
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면서 평양 창전리
일명 '푸른집'으로 이사하여 두 아들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한 생활을 하였 인문기행팀 일원이 이효석문학관을 차분히 둘러보고 있다.
사진 차상현
288 남경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