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4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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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마을)
현재의 화성초등학교가 있는 북쪽마을의 옛 지명으로 박가 동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구한말 박영효가 은계동에 별장을 짓고 살면서 일대에 과수원을 운
영하여 박동이란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매홀중학교 남쪽에 박씨
가 살아 붙여진 지명이라고도 한다.
★은계동(銀溪洞)
은개 혹은 위개라고도 하였으며, 원래는 화성군 동탄면 금곡리(金谷里)였으나,
1987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007호(1986년12월23일 공포)에 의하여 오산읍에 편
입됨에 따라 은계리로 되었다. 은계동은 동탄면 소일 남쪽 마을로 오산천변의 마을
이며 은빛처럼 맑은 계곡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박영효 별장 자리(집)
당시 집사의 얘기로는 박영효 별장은 동탄면 금곡 3리였고, 지금은 오산시 은계동
64번지이다. 1960~70년대에는 유림각 호텔과 주변이 별장 자리이었고, 현재는 다
세대주택이 들어서 있다.
별장은 양철 지붕으로 된 단층이었고, 방이 네 개였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집을
궐집 또는 궁집이라 불렀다 한다. 그 집은 1957년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대문
은 솟을 대문으로 대한문을 본떴는데 크기는 대한문의 3분의 2였다니 대단히 웅장
하고 컸다. 별장은 정원을 곁들였는데 2천여 평이 넘었다고 한다.
박영효는 중국인을 고용하여 앞 텃밭에 토마토를 재배하였다. 3·1독립만세운동 때
에도 이 마을에는 일본 경찰이 얼씬도 못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3·1독립만세운동에
가담했던 마을 사람들은 모두 무사했다 한다. 지금 천태종 황덕사가 있는 곳이 마
구간 자리였고 한 번에 대여섯 필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한다. 그가 말년에
낙향하여 직접 마을사람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집 안팎일을 보살폈는데 품삯은 후
했다고 한다. 별장은 정원이 아름다웠는데 청단풍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그 당시 이
나무는 아주 귀한 나무였다 한다. 그 나무를 중심으로 로타리를 만들었고, 울타리는
구기자와 산수유를 심었다 한다. 박영효가 그 곳에 머물 때는 뒷산에서 일본 경찰
이 보초를 설 때도 있었다 한다. 지금은 다세대주택이 들어서 있다. 뒷산 너머에 그
의 과수원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박영효의 과수원이 있던 그 자리를 박동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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