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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부락제』의 ‘부락제의 음악’ 편을 보면 “부락제에서 음악을 연주하 237
는 모습은 현재 그다지 자주 보이지 않으며 또 그 규모도 매우 작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20~30년 구비전승
전까지는 상당히 성대하게 각 지방에서 행해졌던 것 같다. 원래 신을 위한 이런 음악은 전통적으로
굿(神樂)·놀이(神遊)를 전업으로 하여 온 무격이나 무용, 곡예에 능한 광대들에 의해 행하여져 왔으 · 민속
며 상당히 많은 비용이 소요되고 또 이런 제장은 모두 일종의 오락장·향락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 · 경기도당굿과
서 20~30년 전부터 모든 일에 혁신의 기운이 일어남에 따라 먼저 무격의 미신행위에 대한 단속으로
무격의 활동범위가 축소되었다.”고 밝혀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이미 산신제나 도당굿 등에서 세습
무 화랭이들의 역할이 줄어들면서 유교식 산신제 등이 확산된 것으로 보여진다.
경기재인청
193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부락제’를 조사한 이후 처음으로 1967년 당시 문교부 문화재관리국이 전
국 규모의 ‘마을제’를 조사하게 된다. 이는 1972년 새마을운동과 함께 당시 내무부가 미신타파를 앞세
워 ‘마을제’를 강제로 폐지시키던 시기보다 앞서는 것으로 ‘마을제’의 현황을 살펴볼 수 있는 가치 있 / 성씨
는 자료로 평가된다. 그 후 이 자료를 모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한국의 마을제당』이라는 책을 출간 · 인물
하게 되는데 여기에 오산읍 부산리(현 오산시 부산동) 웃알마을과 금암리(현 금암동)의 마을제가 기
록된다. 부산동의 마을제를 살펴보면 “매암산신당이 마을 앞산에 목조기둥과 초가지붕으로 된 4평
정도의 제당이 있고, 둘레 3m 정도의 신목(神木) 한 그루와 돌무더기 제단이 있다.”고 당의 형태에
대해 밝히고 있다. 또한 “제관 1명, 축관 1명, 화장 1명, 당주 1명 등 4명만이 산신제에 참석했고, 산신
제 3일 전부터 목욕과 근신으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내용은 1930년대 무
라야마 지준이 조사한 유교식 산신제와 유사하게 산신제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1960년대 문화재관리국에서 조사한 오산시 부산동의 매암산신당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