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7 - 관악부 100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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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U  W   O
                                                                                                                  총론










               한다고 광고하기도 하였다. 한편 1935년도에는 음악부에서 편집한 교가 응원가집인 수진책자(

               袖珍冊子)가 발간되어 당시 학생들의 생활과 보전학생들의 기상을 엿 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고 전한다. (고려대학교 100년사 p, 475)





               3. 고려대 취주악부(吹奏樂部)




               보성전문은 1934년 현재 위치인 안암동의 넓은 대지에 서구(西歐)의 궁전(宮殿)같은 웅장(

               雄壯)하고 수려(秀麗)한 석조(石造) 본관을 신축하고, 1937년에는 도서관을 준공 개관하고,
               1946년 8월에 법정대학 경상대학 문과대학의 3개 단과대학으로 편성된 종합대학의 고려대학

               교가 새로 설립되어 발전을 거듭하던 차에 1950년 6월에 뜻하지 않았던 민족참변(民族慘變)
               인 6.25전쟁으로 1951년 9월에 대구에 피란하여 목조 임시 가교사(假校舍)를 마련하고 수업

               을 하다가 1953년 8월 환도(還都)후에 종합대학으로의 기구와 내용 확충에 전념하여 1955년
               4월과 1959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대학원과 법과대학 상과대학 문리과대학 농과대학 정경대

               학의 5개 단과대학을 두게 되었다.
                 1951년 대구 원대동(院垈洞) 임시교사를 개교하여 수업하다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조인되어 휴전선으로 국토가 양단(兩斷)되었다. 고려대는 환도 후 美 제5空軍通信
               部隊가 주둔하고 있던 학교의 반환을 수차 요구하였으나 여의(如意)치 않아 계동(桂洞)의 中央

               高等學校의 교사(校舍) 일부를 빌려서 수업하였다.

                 필자와 같은 문리대(文理大) 지망생들의 학번은 수복(收復)후 처음인 1955년 입학시험을 서
               관(시계탑) 신축건물의 1층 벽체(壁體)만 올리고 천장은 없는 콘크리트 바닥에 가마니 한 장씩

               깔아 놓고 책상도 없는 바닥에 엎드려 마분지(馬糞紙)같은 받침을 받치고 몇 시간의 시험을 치
               르는 고통을 당했으나 엄동설한(嚴冬雪寒)의 추위나 신체의 통증(痛症)은 느끼지 못하였다.

                 극심한 경쟁을 뚫고 합격하여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은 화창(和暢)한 4월의 봄날 한가하게 본
               관 앞 넓직한 교정을 거닐고 있는데 (당시는 본관과 도서관 두 건물뿐이며 본관 1층에는 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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