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 - 전시가이드 2024년 08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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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덕 컬럼
도자기,꽃 그리고 자연. 80.3x53cm. mixed media on canvas
청화백자(靑華白磁)와 전통민화의 collaboration
되었다가 17세기에 다시 준수하고 무늬가 단순한 청화백자가 생산되어 보급
도예화가 이 영 실 되었다. 이때에는 꽃병·연적·술병·필통 등 실용적인 물건들이 백자로 만들어
져 일상생활에까지 쓰이게 되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페르시아의 회청보다
값이 싼 서양의 청화가 수입되면서 보다 많은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사용
글 : 김재덕(갤러리 아트팜 관장 칼럼니스트) 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조선시대 후기까지 유행하게 되었다.
도예를 전공한 이영실은 청화백자의 조형미를 모티브(motive)로 하여 독창
적인 창작세계로 천착(穿鑿)하고 있는 현대회화 작가로 활발한 활동을하고
청화백자(靑華白磁)는 코발트(cobalt blue)로 무늬를 그려 넣은 조선시대의 있는 작가이다. 정통 도예표현으로 작가가 추구하는 창작의 가치에 갈망하던
백자로 정의할 수 있다. 흰 바탕에 푸른색(코발트)으로 산수·나무와 풀·꽃·새 과정에서 한국화를 통한 회화 표현으로의 모색을 위해 한국화 작업실을 찾아
등을 그려 넣은 도기(陶器)로 조선시대인 14세기 말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사사받기도 하였다. 창작에 대한 열망이 커서인지 작가는 그 외 표현의 채료
15세기 중반 이후 본격 생산되었다. 코발트 안료로는 페르시아 지방에서 생산 (彩料)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현하기 위한 담론
되어 중국을 통해 수입된 회회청(回回靑)이 쓰였는데 세조 때는 수입이 어려 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수묵은 물론, 아크릴과 다양한 오브제(objet)의 콜라보
워 백자를 술그릇으로만 사용하게 했으며, 때로는 불순물이 많이 섞인 코발트 (collaboration)를 통한 도자기와 회화표현의 조화를 한 캔버스에 이루고자
안료인 토청(土靑)을 만들어 썼는데 이 또한 수량이 적어 청화백자의 대량생 수많은 습작과정을 당연시 수용해 나갔다. 작가의 일련의 접근과 시도는 지금
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기에 당시 청화백자는 사치품으로 분류되어 엄격 의 오브제와 함께하는 한국적 필선의 조화로움을 이끌어내는 자양분이 되었
하게 사용이 제한됐고 주로 왕실이나 사대부 집안에서 사용되었다. 무늬에는 으며 소박한 한국미를 표현하는 독창적인 회화장르를 개척하는 결실을 맺게
주요 무늬(주문양(主文樣))와 부수적인 무늬(종문양(從文樣))가 있는데 처음 되는 원천이 되었음을 공감하게 해준다.
에는 주문양은 명과 유사했으며 종문양은 도식적인 명나라 초기의 무늬를 썼
다. 그러다가 15세기 중엽부터는 종문양이 사라지고 여백을 많이 살린 간결하 “도자기와 꽃을 보면 나는 강한 생명력을 엊는다. 아마도 신은 고달픈 삶에 감
고 소박한 회화적 무늬만 남게 되었다. 백자의 생산은 임진왜란으로 거의 중단 동을 줄 목적으로 신이 꽃을 창조했을 것이다. 특히 어릴적 노닐던 고향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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