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0 - 전시가이드 2024년 08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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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과 컨템포러리 아트



































                    흥복헌 전경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던                                   왕조는 27대, 519년 만에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이때의 상

                                                        황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순종 3년 8월 22일 기록을 통해 보자면
        창덕궁 흥복헌(興福軒)                                    '한일병합조약안(韓日倂合條約案)에 대하여 국무대신(國務大臣) 외에 황족(
                                                        皇族) 대표자 및 문무 원로의 대표자들이 회동(會同)하여 어전회의(御前會議)
                                                        를 열었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짐(朕)이 동양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글 : 박일선 (단청산수화 작가, (사) 한국시각문화예술협회 부회장)
                                                        한 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 피차 통합하여 한 집으로 만드는 것은 상호 만세
                                                        (萬世)의 행복을 도모하는 까닭임을 생각하였다. 이에 한국 통치를 들어서 이
                                                        를 짐이 극히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기로 결정하고 이어서
        8월은 우리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광복된 날과 나라가 멸망한 날이 함께 있는     필요한 조장(條章)을 규정하여 장래 우리 황실의 영구 안녕과 생민의 복리를
        달이다. 조선 왕조가 멸망한 경술국치라는 말이 나오면 경복궁에 있는 흥복헌       보장하기 위하여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에게 전권위원
        (興福軒)이 떠오른다. 흥복헌은 대한 제국이 일본에 병합되는 조약을 체결하       (全權委員)을 임명하고 대일본제국 통감(統監)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기 위한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던 장소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는 장소이다.        와 회동하여 상의해서 협정하게 하는 것이니 제신(諸臣) 또한 짐의 결단을 체
                                                        득하여 봉행하라." 라고 순종이 명하였다.
        흥복헌은 대조전(大造殿)의 동쪽에 붙어있는 부속 건물로서, 흥복(興福)이란
        일어날 흥(興) 자와 복 복(福) 자를 써서 '복을 불러일으킨다'라는 뜻이 담겨 있  이날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을 지금까지 한번도 읽어 본적이 없어 궁금해서 찾
        다. 그러나 흥복이란 이름과는 달리 복이 아닌 모진 풍파를 겪었던 건물이다.      아 봤다. 내용은 '한국 황제 폐하(皇帝陛下) 및 일본국 황제 폐하(皇帝陛下)는
        대조전에 딸린 부속 건물이었기 때문에 대조전과 역사를 함께 할 수밖에 없        양국간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
        었는데 여러 차례 화마를 겪었다. 1405년(태종 5) 창덕궁이 창건될 당시 지어   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하여,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병
        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년(광해  합하는 것 만한 것이 없음을 확신하여 이에 양국 간에 병합 조약을 체결하기
        군 원년)에 복구하였고,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 때 소실된 것을 1647년  로 결정한다. 이를 위하여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
        (인조 25)에 다시 재건하였다. 1833년(순조 33) 또다시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  완용(李完用)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統監) 자작(子爵) 데라우치 마사타케(
        해 1834년(순조 34)에 재건하였다. 이후 일제 시대인 1917년 창덕궁의 대화  寺內正毅)를 각각 그 전권위원(全權委員)에 임명한다. 위의 전권위원은 회동
        재로 대조전이 또다시 소실되었는데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을 뜯어 소실된       하여 협의하여 다음의 여러 조항을 협정한다.
        대조전과 부속 건물들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
        역사적으로는 1910년(융희 4) 8월 22일 조선 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御前    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會議)가 열렸던 곳이다. 이날 이곳에서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의 조인        제2조
        을 맺었고 그로부터 1주일이 지난 8월 29일 이 조약을 반포(頒布) 함으써 조선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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