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8 - 2022년 03월 전시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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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과 컨템포러리 아트






























        창덕궁 희정당 전경





        인상주의 단청...희정당                                   벽체, 전기 조명 등 인테리어를 유럽풍으로 꾸몄고 가구, 집기 등은 유럽 제
                                                        품을 들여 놓았다.
        글 : 박일선 (단청산수화 작가)
                                                        응접실 벽에는 대형 회화 작품 2점이 걸려 있다.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1919년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그린
                                                        사생(寫生)을 바탕으로 금강산의 파노라믹한 풍경을 전통 궁중화법에 근대적
        창덕궁의 희정당(熙政堂)은 구한말 국왕이 정사를 보던 편전(便殿)으로 정면       기법을 융합하여 그린 작품이다. 해금강총석정절경도(海金剛叢石亭絶景圖)
        11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창덕궁의 본래 편전은 선정전이었고       는 동쪽 벽에,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는 서쪽 벽에 붙어
        희정당은 내전에 속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편전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있는데 2점 모두 높이 2m, 길이 9m나 되는 기념비적인 걸작이다. 화려하면서
        창덕궁을 창건할 때 왕이 학문을 닦는 곳이라는 의미로 수문당(修文堂)이라        강렬한 채색으로 사실적인 표현을 구사하면서도 기존 산수화와 다르게 수평
        하여 세웠으나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1496년(연산군 2) 화재로    의 파노라마 구도 등 독창적인 구도와 시점을 사용하여 마치 금강산의 실경을
        소실되어 재건하면서 '정치를 잘하면 모든 일이 잘 되고 백성이 화락하게(萬       보는 듯한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姓咸熙) 된다'는 의미가 담긴 희정당으로 바뀌게 되었다.
                                                        단청도 응접실과 현관이 단연 눈길을 끈다.
        이후 화재의 역사는 거듭되어 4차례나 겪게 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응접실의 단청은 머리초를 6휘까지 하고 계풍에는 장단과 삼청으로 채색하여
        때 소실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에 창덕궁이 재건될 때 다시 지어졌으며,     화려함을 높였다. 천장 반자에는 종다라니를 하고 청판의 중앙에 봉황을, 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인경궁(仁慶  귀퉁이에 박쥐 문양으로 단청을 하였다. 박쥐를 그린 이유는 복을 상징하기
        宮)을 헐어 그 자재로 재건하였다. 1833년(순조 33) 또 다시 소실되어 이듬해   때문이다. 박쥐는 한자로 편복(蝙蝠)이라 하는데 박쥐 복(蝠)자와 복 복(福)자
        재건되었으나 1917년에 화재로 타 버리고 1920년에 경복궁의 강녕전을 옮겨     는 중국식 발음이 서로 같아서 복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길상 문양이 되었다.
        지어진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회화나 공예품, 가구의 장식 등에 많이 사용되었으며 여성의
                                                        장신구인 노리개에까지 복을 기원하는 박쥐 문양을 새겼다.
        처음에는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아서 인조 때 재건할 당시만 해도 15칸에 지      현관의 단청은 병머리초에 6휘를 하고 네 기둥의 앞쪽과 좌우 양쪽에 붙어 있
        나지 않았다고 한다. 계속된 화재로 재건할 때마다 규모도 달라지고 건물의 용      는 낙양에는 대한제국의 문장(紋章)인 오얏꽃 문양을 새기고 금칠을 하였으
        도도 바뀌었으며 후에 편전으로 쓰이게 되면서 규모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며, 연화와 당초 문양을 초각하고 단청을 해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반
        당초 건물 앞에는 왼쪽에 연못이 있고 작은 뜰이 조성되어 있었으나 1920년      자에는 종다라니를 하고 청판 중앙에 장수를 기원하는 목숨 수(壽)자와 네 귀
        재건하면서 많은 개조가 이루어졌다. 건물 외부의 남쪽으로 기존 전통 건물에       퉁이에 복을 기원하는 박쥐 문양으로 화려하게 단청을 하였다.
        서 볼 수 없던 돌출 지붕이 설치된 현관은 자동차 진입이 가능하게 만들어졌       이곳 단청에 쓰인 색조는 황, 장단, 육색, 양록을 주로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매
        다. 이는 국왕이 행차를 할 때 근대식 이동 수단인 자동차로 움직이게 되면서      우 밝고 화사하다. 마치 서양 회화에서 인상파의 색조와 비슷한 느낌이며 인
        도입된 서양식 구조이다.                                   상파 화가들의 활동 시기와 희정당의 단청이 조성된 시기도 시대적으로 엇비
        건물의 내부도 서양식을 도입하여 응접실과 회의실에 한식을 기본으로 하면         슷하다. 그렇다면 희정당의 단청을 인상주의(impressionism) 단청이라 불러
        서 서양식을 가미한 실내장식을 하였다. 바닥마루, 유리창문, 문 상부의 휘장,     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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