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2 - (사회돋보기)노규수 컬럼집-본문(최종)_N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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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홍명보 감독은 2012년 한국축구를 부흥시킨 ‘올해의 골’과 ‘올해의 선
수’ 두 명 모두를 국가대표팀에 선발하지 않았다. 감히 아무나 할 수 없는 눈물
의 결단이었다. 하지만 더 큰 목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린 판단이었다.
홍명보 감독은 한국축구의 부활을 위해 6월 하순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았
다. 그 이면에는 6월 18일 서울에서 열린 이란과의 월드컵 아시아예선 A조 최종
전에서 한국이 이란에 0대 1로 패배한 데 따른 악화된 여론이 최강희 감독의 경
질로 이어졌다는 사실이 있다. 경쟁국인 B조의 일본이 5승 2무 1패 승점 17점이
라는 아시아 최고점수로 깨끗하게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것과 너무나 비교되었
다. 그때 나는 2002월드컵에서 한국을 4강으로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을 생각했
다. 그가 바로 홍명보 감독의 스승이다.
히딩크가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한국에 처음 온 것은 2000년 12월 17일
이었다. 2002년 월드컵을 고작 1년 6개월 남겨둔 시점이다. 솔직히 그때 나는
그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또한 제아무리 유능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18개월 만
에 한국팀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나만이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나 축구팬들도 그
랬다. 다만 히딩크에게 한 가지 바람이 있었다면, 2002년 월드컵이 한국과 일본
에서 동시에 열리는 ‘안방 대회’인 만큼 한국축구의 염원이자 주최국의 체면 세
우기인 ‘월드컵 본선 1승’을 제발 달성해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히딩크는 그 이상의 목표를 비전으로 제시했다. 그는 인천공항의 입
국 기자회견에서 “한국이 월드컵에서 꼭 1승을 거두도록 하겠다. 16강 진출을
반드시 이루겠다. 나는 배가 고픈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2002월드컵을 앞두고
축구를 거의 신앙이자 국기(國技)처럼 여기던 국민들은 ‘설마’ 했다. 히딩크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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