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1 - 칭의와 성화-김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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쁨이니라”(살전 2:19~20). “…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
랑하는 자들아…”(빌 4:1).
바울 자신이 데살로니가 교회와 빌립보 교회를 ‘책망할 것이 없는’ 또는 ‘흠 없는’ 교회로,
즉 ‘금과 은과 보석으로’ 세워 올렸으니, 하나님이 그 공로를 인정하여 큰 면류관을 씌워
주시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교회들이 바울이 큰 면류관을 받을 근거가 된다는 것이 아
닙니다. 그 교회들 자체가 그의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그 교회들이 심판의 불에 의해 바
울 자신이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것으로, 즉 ‘책망할 것이 없는’ 또는 ‘흠 없는’ 교회로
찬란히 드러나는 것, 그것이 그에게 큰 자랑거리가 되고, 기쁨을 주는 면류관이라는 것입
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고린도전서 9:18의 ‘상’이 3:14의 ‘상’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임을 이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자비량적 희생으로 복음을 무료로 선포하는 것 자체가 그
에게 ‘상’인 이유는 그것이 곧 교회를 ‘금과 은과 보석으로’ 세워 올리는 것이어서, 그렇게
세워 올린 교회가 최후의 심판 때 심판의 불에 의해 소실되지 않고 남되, ‘금과 은과 보석
으로’ 지은 것으로 찬란히 드러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책을 읽고 계시는 분들은 많은 혼란을 느낄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오랫동안
최후의 심판 때의 의로운 삶과 봉사에 대한 ‘상’을 구원 위에 덧붙여 받는 어떤 좋은 것(면
류관, 아파트 로열층)으로 생각하도록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믿어 칭의 된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되, ‘성화’를 잘 이룬 사람들 또는 하나님 나라에 특별히 크게 공헌
한 사람들은 구원에 더하여 ‘상급’을 받는다는 설교를 수없이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신학적으로 사고할 줄 아는 사람은 그런 가르침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구원 자체가 하나님의 신적 충만에 들어감, 그리하여
신적 생명을 얻음, 즉 하나님의 영광을 얻음, 하나님의 형상을 얻음, 즉 하나님과 같이 됨
인데, 거기에 무엇을 더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 능력, 사랑, 영원)에
참여함인데, 거기에 무엇을 더 얻는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초등학교 산수만 배워도 압니
다. 무한대에 1000을 덧붙인다고 더 커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얻은 사람이 황금
1000냥짜리 면류관을 쓴다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큰 영광을 얻는 것입니까?
바울은 ‘상’ 또는 ‘면류관’이라는 말을 이렇게 자신의 사도적 사역이 최후의 심판의 불에 의
해서, 바르고 헌신적인 복음 선포로 하나님 나라의 총체적 실현(하나님의 집을 건축함)에
있어 그가 맡은 부분을 온전히 감당했음(즉,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음)이 드러나는 것, 그
가 세운 교회들(예를 들어,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이 흠 없고 영광스런 교회로 환
히 드러나는 것을 지칭하여 씁니다(고전 3:14~15; 9:18; 빌 4:1; 살전 2:19~20).
그러나 바울은 ‘상’ 또는 ‘면류관’이라는 말을 우리가 종말에 얻을 구원 자체를 지칭하여 쓰
기도 합니다(고전 9:23~27; 빌 3:12, 14; 롬 2:5~10; 골 3:24; 참조. 딤후 4:8). 우리가 칭의
된 자들로서, 즉 하나님의 나라로 이전된 자들로서, 이중 사랑 계명(하나님/그리스도의 법)
을 지키라는 요구의 형태로 오는 하나님/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순종하여 의의 열매
를 맺는 삶을 사는 것, 또 각자에게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해 부여된 하나님의 소명을 충실
히 감당하는 삶을 사는 것을 바울은 경주 등 운동 경기의 그림으로 즐겨 비유하면서, 그러
한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 ‘상’ 또는 ‘면류관’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이렇게 칭의의 현재 과정(구원의 서정의 언어로 말하자면‘성화’의 과정)을 경주로 비유하
는데, 이때 ‘상’ 또는 ‘면류관’은 그 과정의 끝에 있을 최후의 심판 때 주어지는 칭의의 완
성, 곧 구원 자체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상’ 또는 ‘면류관’이라는 말을 이와 같이 두
가지로 사용하되, 구원 위에 덧붙여 주는 ‘상급’의 의미로는 쓰지 않습니다. 바울이 ‘상’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