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9 - 칭의와 성화-김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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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주지 않습니다. 권력이 행복을 주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침
            대 삼아 살듯이 자연에 순응하여 단순히 사는 삶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하고 멋진 수사적
            강연을 하고는, “그러니까 나는 집도 절도 없으니 여러분들 한 푼씩 보태시오” 하고 모자
            를 벗어 돌린 후 돈을 받아서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살았습니다. 그들 중 더러는 제자
            들을 모아서 가르치고 학비를 받기도 했습니다.
            바울의 선교단이 고린도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가 복음 선포자의 생계에 대한 예수의 말
            씀을 순종한답시고, 광장에 서서 복음에 대한 일장 강연을 하고는 모자 돌려서 생계를 위
            한 돈을 받으면 고린도인들의 눈에 바울이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냉소주의 철학자들이나
            소피스트들 중 하나로 보였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그의 복음도 그들의 행복한 삶, 구원
            을 가져다준다는 지혜의 가르침들 중 하나로 보였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바울이 복음
            을 효과적으로 선포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니지요.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은 복음을 효과
            적으로 선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행태에서 냉소주의 철학자들이나 소피스트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임으로써 복음을 그들의 가르침들로부터 확실히 차별화해야 한다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헬라 선교의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문자대로 이행할 수가 없었
            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성취하려 했던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정신, 그 의도였습
            니다. 그 정신, 그 의도가 무엇입니까? 복음의 효과적인 선포 아닙니까? 그러니까 바울은
            예수의 말씀의 정신/의도를 실현하기 위해서 그 문자를 어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고
            후 3:6 참조). 그래서 자신의 생계는 천막 공장에서 자신의 육체적 노동으로 벌면서, 그 공
            장의 일꾼들에게 그리고 광장이나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무료로 선포하여 자신
            을 냉소주의 철학자들과 차별화하면서 동시에 복음을 그들의 가르침들과 차별화하되, 은
            혜의(값없는) 복음을 값없이, 무료로 선포하여 복음의 은혜성을 효과적으로 시위한 것입니
            다. 이렇게 복음, 즉 하나님이 무료로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선물을 무료로 제
            공하여 복음의 은혜성, 선물성을 효과적으로 시위함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효과적으로 선
            포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헬라 도시들에서 선교하던 바울의 상황에서는 복음 선포자
            의 생계에 대한 예수의 말씀을 진정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배경적 이해를 가지고 고린도전서 9:15~18의 토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바울의 이
            러한 자비량의 선교 원칙은 그 자신에게는 엄청난 희생과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고
            린도전후서에 다섯 번이나 되뇌는 그의 ‘고난 목록’에서 그는 항상 자신의 중노동과 헐벗
            음, 굶주림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입니다(고전 4:11~13; 고후 4:7~10; 6:4~10; 11:23~27;
            12:10; 참조. 살전 2:9~10). 그의 이러한 희생적 자비량의 선교로 데살로니가에, 그리고 고
            린도에 교회가 세워져서 이제 그 교회들의 생계 지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도, 바울은 그 교
            회들에 누를 끼칠까 봐, 그래서 혹 복음 선포에 지장을 초래할까 봐 계속 무료로 복음 선포
            사역을 감당한다고 합니다(고전 9:12; 고후 11:7~9; 살전 2:3~11).
            고린도전서 9:15~18에서, 복음 선포자의 생계에 대한 예수의 말씀을 잘 활용하며 선교한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자신은 희생적 자비량 선교로 그 말씀의 의도대로 복음을 가장 효
            과적으로 선포하려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는,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나
            의 상이 무엇이냐?”(9:18).
            여기 앞서 고린도전서 3:14에서 사도들의 사역과 관계하여 썼던 ‘상’이라는 말을 다시 씁
            니다. 앞에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3:10~15에 대한 다수 주석가들이나 설교가들의 해석을
            살펴보았습니다. 고린도전서 3:14의 ‘상’에 대한 그들의 해석이 옳다면, 이곳 9:18에서도 ‘
            상’이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바울은 자신의 질문에
            당연히 이렇게 답해야겠지요. “나의 상은 (다른 사도들이 받을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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